매거진 대문밖

대문밖

가는길

by 이강

1. 가는 길

엄마 아빠 없이 동생과 단둘이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몇 살부터 일까? 여름이건 겨울이건 방학이 다가오기 몇 주 전부터 할머니 댁에 가기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옷 몇 가지와 방학숙제를 위한 스케치북 크레파스, 일기장과 아끼는 마론 인형이 고작인데 설레는 마음으로 가방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죽어라 준비해봐야 엄마 아빠가 움직이지 않으면 마냥 기약 없이 기다려야하니 이번에는 어른의 도움 없이 동생과 둘이 버스를 타고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동안 이날을 위해서 명절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 때면 틈틈이 버스 시간과 ‘대평리’라는 푯말을 외우고 대충 가는 방향을 익히려고 졸지 않고 버스창밖을 내다보며 수시로 준비했다. 가장 힘든 관문은 내리는 장소다. 버스 안내방송도 없이 전광판도 없이 누구도 알려주는 사람 없이 낮 익은 장소다 싶으면 알아서 내려야 하는데 시골의 특징은 그 다리가 그 다리고, 그 나무가 그 나무고 그 산이 그 산이다.

방학이 되기 무섭게 여동생과 함께 엄마의 허락을 받고 할머니 댁으로 출발하려 대문을 나서자 어젯밤까지는 자신만만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버스 정류장까지 30분을 걸어가며 별별 생각을 다한다. 혼자서 과연 무사히 할머니 댁에 도착 할 수 있을까?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산을 넘고 개울을 따라 집으로 찾아 올수는 있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동생의 손을 꼭 잡는다. 동생은 용감한 것인지 생각이 없는 것인지 웃는 얼굴로 춤이라도 추듯 ‘폴짝폴짝’ 걸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막상 정류장에 도착하니 심장이 콩닥콩닥 거리고 얼굴이 굳어 버리는 것이 후회가 밀려온다. 억지로 웃어 보려하지만 웃음은 안 나오고 어른 없이 할머니 댁 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갈등이 생긴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할머니 댁에서 놀 생각을 하자 다시금 용기가 난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을 바싹 차리자! 줄줄이 오는 버스에서 대평리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몇 번을 뛰어가서 푯말을 확인하지만 차라리 천천히 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말았다 들었다 말았다. 하루에 몇 대없는 버스를 놓치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일렁이는 마음이 잠잠해 진다. 드디어 멀리서 ‘대평리’ 버스가 눈에 온다.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주춤거릴 사이도 없이 자동으로 올라탄다. 이런 일을 감수하면서도 꼭 가야할 정도로 할머니 댁이 좋은가 보다. 간신이 버스를 타고 내리기 편한 출입구 쪽에 자리 잡고 이제 졸지 말고 정신 차리자고 동생과 눈빛을 교환을 한다. 황토 빛 뿌연 먼지가 버스 뒤를 바싹 따라붙고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먼지가 버스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덮는다. 올라타는 사람에게서 흙먼지 냄새가 나고 흙먼지가 차창으로 훅 들이쳐도 얼굴한번 돌리지 않고 창밖만 쳐다본다. 버스만 타면 어김없이 꾸벅꾸벅 조는 동생의 눈도 틈틈이 확인한다. 한번 잠이 들면 널푸러져 자는 동생을 흔들어 깨우다가 버스가 그냥 떠날까봐 겁나기도 했다. 뚜렷한 정거장도 없이 그저 비슷한 논과 밭 거기가 거기 같은 야트막한 산이 계속 지나가기 때문에 둘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억을 더듬거리며 낮 익은 다리라도 나오면 안도감에 서로 고개를 끄떡이며 미소 짓는다. 재대로 가는 것 같다. 할머니 댁 정류장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개울물이 서서히 넓어지며 높은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휘어 감듯이 급커브로 꺾자마자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고 멀리서 초등학교가 보일 듯 말듯하다 덕지덕지 녹슨 빨간 지붕의 구판장이 보이는 곳이 할머니 댁 정류장이다. 맞게 찾았다. 낮 익은 곳에 내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버스 안에서 마음 졸이고 졸이느라 숨 한번 크게 못 쉬었는데 재대로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깡충깡충 뛰며 괜히 ‘헤헤헤, 하하하, 깔깔깔’웃으며 서로의 웃는 얼굴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 또 웃는다. 어른 없이 동생을 데리고 정확하게 할머니 댁 정류장에 내렸다는 기분은 짜릿한 성취감이다. 기념으로 구판장에 들어가 풍선껌과 할머니가 좋아하는 청포도 맛 사탕 한 봉지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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