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는길
구판장 할아버지가 가만가만 보더니
“오얏골 변씨네 손녀딸들이구나. 니들끼리 왔어?”
“네에 안녕하세요.”
들뜬 기분에 평소보다 크게 인사를 한다.
“아이구야 다 컸네. 니들이 학선이 자손이냐?”
아빠를 이렇게 이름만 부르는 것이 낮 설어 한 번에 알아듣지 못했지만 왠지 그마저도 친근감이 든다.
“네에”
“아침나절에 할아버지 장에 가셨다”
하며 조그만 안경너머로 웃으며 잔돈을 주신다. 아는 척을 해주니 어깨가 으쓱해져 귀가 째지는 큰소리로 인사하고 나왔다.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자신감으로 가득 찼다. 버스에서 내렸으니 오곡리 마을로 향해 골짜기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 개울다리를 건너 높은 언덕으로 40분은 올라가야 한다. 무거운 짐도 가벼워지고 지나가는 사람도 가족같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할머니 댁까지 이어지는 개울물소리에 자연스레 개울 길로 향한다. 신발 속으로 주르르 물이 들어오니 차라리 속이 편하다. 쫄쫄쫄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곳에는 작은 웅덩이가 있고 웅덩이를 따라 얇은 물살로 내려오면 송사리가 모여 있고 가장자리로는 자잘한 돌맹이가 물 방향에 따라 조르르 줄서 있을 것이며 그 안쪽으로는 두툼한 모래톱이 연결되어 있다. 마음에 드는 장소라고 생각되면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작정하고 논다. 물속으로 보이는 자잘한 돌맹이가 울렁이는 물결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가고 싶던 할머니 댁도 가깝고 꿈에 그리던 방학에 개울물소리까지 듣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유리알처럼 물속이 훤히 보이며 돌 틈에서 미꾸라지가 나왔다 들어갔다 수줍은 듯이 약을 올린다. 작년에는 할머니랑 가재를 잡아서 된장찌개를 끊였는데 할머니처럼 돌멩이를 살살 들어봐도 자재는 한마리도 안 보인다. 할머니만 잡을 수 있는 특별한 재주가 숨어있나 보다. 개울가에서 물장난도하고 예쁜 돌멩이를 모아 물고기집도 만들고 소꿉놀이도 한다. 물속에서 한참을 놀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걷는다. 걸을 때마다 물이 반쯤 찬 신발에서 ‘쭈뻑쭈뻑’ 물소리가 나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흙바닥을 구르며 구슬로 변한다. 발에 차이는 돌멩이는 대구르르 굴러가고 그 옆으로 키 큰 풀이 한들거리며 바닥에는 자잘 꽃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마을 중간쯤 오면 왼쪽으로 길옆에 우뚝 쏟은 바위가 보인다. 옛날에 도깨비들이 밤에 지들끼리 놀다가 심심하면 바위 뒤에 숨어서 마을로 향하는 사람에게 작은 돌이나 나뭇가지를 던져 사람들을 놀래게 했다는 곳이다. 분명 밤이라면 못 지나갔을 텐데 낮에는 도깨비가 잠자는 시간이다.
도깨비 바위를 지나면 길옆으로 연결된 산 끝자락에 우리가 만들어 놓은 비밀의 정원이 있다.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왔으니 잡초도 우거지고 울타리도 허물어져 뭐가 뭔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려 누가 먼저라고 말할 것도 없이 정원에 뛰어 들어가 손질을 시작한다. 풀도 뽑고 나뭇가지를 주워 울타리도 만들고 개울가에서 주워온 작은 돌멩이를 바닥에 꾹꾹 박아 비밀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쓴다. 비밀의 정원을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 커다란 나무 그늘과 이끼 많은 작은 바위며 두툼하게 쌓인 낙엽까지 환상적이다. 출입구에 자잘한 잎사귀가 달린 나무가 비밀의 문처럼 휘어진 구조까지 완벽하다. 정원 안쪽에는 예쁜 돌만 모아서 만든 몇 개의 돌탑이 있다. 돌탑이래야 높이가 한 뼘도 되지만 낙엽 속에서 돌 찾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고 정성이 많이 들어간 작품이다. 동생은 할머니 댁에 갈 생각도 안하고 정원 만들기에 빠졌다.
신발이며 옷이며 손톱아래 때가 새까매져서야 할머니 댁으로 향하는 마지막 언덕을 오르게 된다. 할머니 댁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이면 버스에서 내린지 몇 시간이 지나있으니 할머니는 걱정된 얼굴로 대문 앞을 서성인다. 회색빛 쪽진 머리에 고양이 눈빛을 가진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를 부르며 언덕 위로 내달려 양손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소리소리 지른다. 커다란 양철대문과 외양간에 소한마리, 헛간근처 닭장 속에 병아리와 어미닭, 야생화가 만발한 꽃밭과 크고 작은 가족사진액자가 길게 늘어선 할머니 댁이 눈에 들어온다. 방문을 열면 할아버지가 곤방대로 피우던 담배냄새와 방금 걸레를 쳤는지 비릿한 물 냄새가 난다. 어깨에 멘 가방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뛰어 나간다. 사방이 놀이터이고 여기저기 우리만의 비밀장소가 숨어있으니 무조건 딜린다. 우측방향으로 돌아 방울무당이 살았던 절터 근처를 향해 큰골 밭을 향해 돌아 달리다가 다시 좌측으로 돌아 전력질주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꽃분이 언니네 집을 끼고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온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 버스타고 왔다고 어젯밤부터 있었던 일을 몇 번이고 말하며 어리광을 부린다. 큰마음 먹고 버스에 오르던 아침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이제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우리할머니가 보고 싶으면 혼자라도 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