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웅덩이
작년만 해도 논이 양쪽 옆으로 펼쳐진 시커먼 진흙 길이었는데 언제 바뀌었는지 하얀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하얀 시멘트길 사이로 걷다보니 연두 빛이 아른거리다 레몬 빛으로 보이다가 하얀색 선을 그은 듯 흰색그림자도 보인다. 진흙길에서 보지 못한 연두색, 레몬색, 하얀색 그림자가 발에 스쳐지나간다. 양쪽으로 펼쳐진 벼를 만져가며 걷다보면 저만치 난간도 없이 위태위태한 작은 쪽 다리가 나오고 쪽다리 아래로 시원한 물이 흐르는데 그곳이 빨래터다. 옆으로 난 돌계단을 대 여섯층만 내려가면 흐르는 물을 사이에 두고 저쪽은 두 개 이쪽은 세 개의 빨래판 구들장이 박혀있고 그 옆에는 만든 날짜나 연도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각각 구들 장 머리에 비누를 놓든 바가지를 놓든 미끄러지지 않게 살짝 손바닥 만한 홈을 파놓는 센스를 보면 빨래터를 만든 사람은 분명 빨래를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시원하게 흐르는 물줄기가 얼마나 센지 빨래터에 앉아 있으면 아글아글 물소리로 사람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개울 바닥에 크고 작은 누런 돌이 물과 부딪히는 소리가 아래쪽으로 갈수록 커지고 물살이 빨라져 잠시라도 딴생각을 하거나 손에 힘이라도 풀리면 빨래를 놓쳐 한참을 텀벙거리고 달려야 겨우 나뭇가지나 바윗돌에 걸린 옷가지를 찾을 수 있으니 빨래를 개울물에 넣고 헹굴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의 모양에 따라 빨래가 위아래로 물결치며 비눗물을 말끔히 헹궈주니 거참 신통방통하다.
할머니나 고모가 빨래터에 갈 때면 빨래터 한편에 있는 웅덩이가 보고 싶어 따라 나선다. 이처럼 예쁜 웅덩이는 세상에는 존재하기 힘들고 동화책 속에서만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투명한 물속으로 바라본 웅덩이 속은 크고 작은 돌로 둥글게 쌓아올린 항아리 모양이고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편안한지 송사리들이 솜털처럼 떠다니고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구름과 잠자리도 희미하게 보이다가 바람의 일렁임이 멈추면 다시 선명해진다. 혼자만 아는 비밀의 문으로 들어 온 것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숨죽이며 웅덩이에 두 팔을 벌리고 돌바닥에 아예 배를 깔고 눕는다. 웅덩이 둘레에 돌아 돌아 핀 무궁화가 보이면 긴 풀 가지를 뜯어 진짜 무궁화인지 아닌지 궁금해져 물 위를 살살 건드려 본다. 잠시 흔들거리는 물이 풀 가지를 잡아당기며 물 표면에 붙었다 떨어졌다 붙었다 떨어졌다. 볼 것이 수두룩한데 할머니와 고모는 빨래 끝 마무리로 슬리퍼를 닦고 있다. 순간 바닥 돌 틈 사이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다시 나올 것 같아 눈이 빠져 라고 보지만 어찌나 빠른지 모래바람만 일으키며 이쪽 저쪽으로 이동만 할 뿐 형체를 모르겠다. 빠르기는 미꾸라지처럼 잽싼데 서서 다니는 듯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몸의 반을 모래 속에 묻고 있어 똑바로 볼 수는 없지만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올여름 웅덩이 속에 또 다른 생명체가 생겼다. 그동안 커다란 집게 손 한쪽만 있는 새우도 찾았고 길쭉한 풀 모양의 벌레도 발견했는데 이처럼 서서 다니는 재빠른 놈은 처음이다. 가끔은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고 상상한다. 웅덩이 속은 왠지 들어가도 숨 쉴 수 있는 곳처럼 물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많은 상상과 아름다움을 주는 무궁화가 가득한 웅덩이는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입을 벌려 웃는다. 할머니와 고모는 물기 없이 꼭꼭 털어 짠 빨래를 대야에 담아 옆구리에 끼고 빨래터 계단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