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ENFP가 MBTI 신드롬을 대하는 자세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OOO’.
밈으로 잘 알려진 어느 배우의 웃짤이 회사 단톡방에 올라왔다.
덕분에 예전 사진 하나가 떠올라 휴대폰 사진갤러리를 뒤져보았다.
대학 4학년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가을의 오후였다.
누군가 가져온 필름 카메라 덕분에 공강시간, 동기들과 교정에서 사진을 찍고 다녔다.
텐션이 얼마나 업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웬 양 조각상에 올라타 두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무슨 이모티콘 마냥 활짝 웃고 있는 스물넷의 내 모습은 지금 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해맑기 짝이 없다.
초등학생 시절, 학기말에 받는 성적통지표에 언제나 ‘내성적’, ‘수줍음이 많다’ 같은 내향형 성격에 부합하는 말들이 적혀있었다.
선생님 앞에서만 얌전을 떨었던 게 아니었던 나에게는 학교 도서실이나 이동문고에서 빌려온 책을 읽거나 책 속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최고의 유희였다.
당시의 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생각이 많다는 INFP의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조금 활발해졌다.
친한 친구들 무리에서라면 제법 농담도 잘하고 분위기도 잘 띄우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자 그동안 숨겨둔 외향 능력이 개화하듯 폭발해 모두에게 인싸, 그 자체로 불렸다.
남을 의심할 줄 모르고 모두와 동료, 아니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해적왕 루피의 쌍둥이 여자 형제 수준이었다.
그 무렵 정식 MBTI 검사를 몇 번인가 받았는데 어김없이 ENFP가 나왔고 왠지 모르겠지만 늘 놀림을 당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가계부를 상상으로 쓰는 주부, 뭐 그런 특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검사결과지를 떠올리면 E와 I, F와 T가 거의 근사한 수치였기에 뭔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졸업 후 직장인이 되고 내 안의 T가 꿈틀거리면서 나는 시니컬한 막말폭격기로 거듭나게 되었다.
때때로 짙은 우울감이 덮쳐오면 동굴을 파고 들어가 INTP처럼 지내기도 했다.
20여 년 전 처음 MBTI 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이 성격유형검사가 이토록 대유행이 되리라는 건 상상조차 못해서인지 여전히 좀 얼떨떨하다.
게다가 나는 꾸준히 MBTI 유형에 대해 떠드는 걸 좋아하는 편임에도 요즘의 과몰입은 솔직히 거북하게 느껴지곤 한다.
나는 종종 유형을 가리고 특징을 읽어 볼 때가 있는데 어느 땐 죄다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가끔은 전혀 엉뚱한 소리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치 경계선에 있는 내 검사결과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MBTI 유형을 물어오기에 나는 약간의 사이를 두고 머뭇거리면서 그게, 검사에서는 이렇게 나오는데... 저는 별로 아닌 거 같다고 부연 설명을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질문의 장황한 대답은 대개 흘려듣기 마련이다.
MBTI의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할 때면 덕분에 타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듣곤 한다.
너는 T 유형이니까 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여도 이해할게.
그 애는 즉흥적이고 정리정돈을 잘 못하니까 P가 확실한 것 같아.
......
이것이 정녕 타인을 이해한다고 볼 수 있는 발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남을 이해하고 싶어 애쓴다는 점에서 아주 작은 인류애를 느끼며 그렇다면 나의 진정한 MBTI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소소한 고민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