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가 핫트렌드인 요즘, 레트로 세대인 X와 Y사이 어딘가에 걸친 애매한 그룹에 속해있고 한창 좋았을 시절 IMF 역풍을 정면으로 맞았던 딱한 20대를 겪었다.
그런 나는 유년 시절엔 상상조차 한 적 없었던 데스크톱, 랩탑, 태블릿, 스마트폰 따위의 값비싼 전자기기를 죄다 섭렵했지만 SF영화에서나 구경하며 선망했던 영상통화 기능은 귀찮아한다.
반면 미래도시의 사람처럼 회사에서 온라인 화상회의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해 팀원들과 소통하고 퇴근 후 전자레인지에 즉석밥을 데우며 시간제약과 광고에서 자유로운 OTT로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밥친구로 삼는다.
처음 입사한 직장에서 격주 토요일 근무를 하고 회계장부에 수기로 숫자를 적던 날들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하는 영역을 떠올린다.
국민학생 시절, 2020 원더키디를 시청하면서 저때쯤이면 외계인이랑 친구 먹고 우주선 정도는 타고 다닐 줄 알았는데 2023년의 나는 오늘 팀회식을 하고 받은 식대 영수증을 딱풀로 붙여 처리하고 20년 전과 다름없이 만원 버스와 전철에 꽉 껴서는 출퇴근을 하고 있다.
물론 손에는 언제나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고 버스와 열차의 배차간격과 실시간 위치를 확인하면서 SNS에 게시물을 올리고 구글 드라이브로 업무 자료를 찾아 이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우리 팀의 막내와 곧 50줄에 들어서는 내가 나란히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는 풍경과도 닮아 있다.
※막내는 BTS의 정국을 제외한 모든 멤버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쓸 수 있어 나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88 올림픽을 본방사수하고 방과 후엔 주판을 들고 주산학원에 다녔고 친구들과 놀다가도 5시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으며 매달 15일이면 책상 밑에 쪼그려 민방위 훈련 방송을 들으며 짝꿍과 키득거렸다.
대학에 가서는 수기로 수강신청을 하고 자필로 된 리포트만 받는 노교수님의 수업을 들었으며 졸업 후 2022년 월드컵 시즌에는 한국팀의 모든 경기를 시청하고 K리그 팬이 되었다.
첫 직장을 그만둔 뒤에는 나름 업계 1, 2위를 다투는 IT회사에서 시맨틱 검색과 쇼핑몰 카테고리 구축을 위한 DB 알바를 꽤 오래 했었는데 이후 온라인 강의를 제공하는 사이버 대학에서 일을 하다가 현재는 대학에서 계약직 연구원 A로 근무하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스타트업 관련 용어를 종종 내뱉으며 외주업체와 미팅을 진행하고 상담전화를 받는다.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포레스트 검프와 국제시장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데 실제로 한국전쟁을 겪은 부모님을 두었고 나 역시도 9시 뉴스데스크를 통해 걸프전과 911 테러를 지켜보며 패닉에 빠진 세대인 것이다.
절망적인 사실은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환경은 나빠진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몇 년째 전 세계에 창궐한 바이러스에 당해 일주일을 꼬박 죽다 살아난 경험치도 챙겼다.
그러나 할리우드 키드이자 이글 FM으로 팝송을 듣던 나는 K팝 곡들이 수시로 빌보드 차트에 오르는 것을 본다.
한국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분의 트로피를 휩쓸어가는 것을 목도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이 그래미에서 공연을 하고 때론 UN에서 연설을 하며 심지어 미합중국 대통령과 대담을 나누는 뉴스를 시청한다.
나는 옛날사람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현재를 살고 앞으로는 미래를 향해 계속 걸어가야 한다.
날로 노쇠해지는 몸을 떠올리면 무척 피곤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우주인과 친구가 되진 못했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지내고 있는 친구의 얼굴을 보며 수다를 떨 수 있는 2023년의 미래는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