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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보로 Mar 16. 2021

씨앗을 뿌리는 스타트업, 농사

로컬단상

어느 날 갑자기 전기 에너지가 사라진다면?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일본, 2017)는 이러한 재난 상황을 가정한 후 도시의 한 가족이 어떻게 생존하는지를 보여준다. 전기가 없으니 전등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가전제품은 무용지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물도 안 나오고 가스도 끊긴다. 여기에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이 두절되고 상점에서도 신용카드 결제가 불가능하여 일상이 멈춘다. 도쿄에 사는 스즈키 가족은 이러한 재난을 마주하고 피난을 떠나는데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도시인 스즈키에게는 큰 시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스즈키 가족을 구원한 곳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자신의 고향인 시골 어촌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어촌 사람들은 전기 대란에도 큰 어려움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전기가 없어 조금 불편할 뿐이지 생존해 나가는 데는 지장이 없어 보인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식량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문명이라고 불리는 기술과 상품들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져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서바이벌 패밀리>.


이처럼 자급자족은 생존의 기본이다. 도시는 편리함과 쾌적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상품이고 돈이 없으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불안정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은 개인 간의 단절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마치 영화 속 스즈키 가족이 거실에 함께 모여 있어도 서로 간의 대화는 없고 각자의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듯이 말이다. 과거 티브이 수상기 앞에 4인 가족이 모여 있을 때의 광고 매체는 하나지만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본다면 광고 매체는 4개로 불어난다. 다시 말해 개인 간의 단절은 자본의 수익으로 연결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전기가 사라지는 재난에 닥치자 오히려 가족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회복된다. 이쯤 되면 진짜 재난 상황은 어느 쪽이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든다.


며칠 후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10년이 된다. 지난 10년 사이 일본인은 인생과 생존이라는 화두 앞에 많은 고민을 해온 듯하다. 언제든 인생을 마감할 수 있게 단출한 삶을 지향하는 단샤리(断捨離, 물건을 들여오는 것을 끊고, 집에 쌓여있는 물건을 버리며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경향이 나타난 배경이다. 이들 중에서는 홀가분해진 몸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주하거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사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었다. 이른바 ‘다거점거주(多拠点居住)’라는 노마드 라이프스타일이다.


또한 농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젊은층도 많아졌다. 과거에는 대학을 나와 농사를 짓겠다고 하면 “아니 왜?”라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좋지!” 하는 사회 공기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미증유의 자연재해와 도시의 숨 막히는 자본주의 경쟁을 목도한 청년들이 농사를 지으면 적어도 굶어죽지는 않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한국의 청년도 비슷하다. 로컬에서 맥주를 만들거나 커피를 볶고 파스타를 만드는 청년도 있지만 농사를 짓겠다는 청년이 늘고 있다. 농산물 재배와 유통에 ICT 기술을 접목하기도 하고 디자인과 브랜딩으로 무장하여 마케팅을 펼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변화 속에서 농산물 생산자에게 투자하고 건강한 먹거리로 돌려받는 크라우딩 펀딩 플랫폼 ‘농사펀드’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아예 직접 농촌으로 뛰어든 농사 스타트업도 있다. ‘팜프라’는 남해에서 청년 자립 마을을 만들기 위해 분투를 벌이고 있는데 이들은 농산물뿐 아니라 자신들의 농촌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한다. 또한 주거 안정을 위한 집짓기라든지 식량 및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술 네트워트 구축에도 힘을 쓰고 있다. 수익 창출로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 일만큼 비영리 영역도 이들에게는 중요한 가치다.


얼마 전 농사펀드의 박종범 대표가 페이스북에 쓴 글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따지는 지역 청년 지원 사업이 농촌의 정체성 기반인 농업보다는 숙박이나 요식업 등 관광 콘텐츠 개발을 선호한다는 우려를 표명한 글이다. 이어 최근 활발하게 전개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양성 사업이 자칫 농촌을 도시화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가장 고민스러운 대목은 도시의 예비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지역 농부를 대하는 시혜적 시선이라고 말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까지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식량자급률이 OECD 최하위 20%대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도 공허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시골에서 가장 크리에이티브한 일이 농사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로컬의 골목을 경리단길화 하는 일이 지역 혁신이 아님을 상기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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