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에서 소녀가 소년에게 말한다.
“서핑을 해보지 그래?”
“바다가 무서워.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소년이 대답한다.
“서핑은 바다와 하나되는 순간이 있어. 섹스처럼.” 소녀가 말했다. 나에게 커피가 그렇다.
서핑은 먼 바다에서 생긴 파도의 마지막 부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소녀의 아버지가 말한다. 커피는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자란 커피나무의 마지막을 볶아 내리는 일이다.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향을 머금은 커피의 마지막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이는 일이다.
나는 커피를 볶으면서, 커다란 솥뚜껑 위에서 생두를 볶는 에티오피아 여인을 상상한다. 후라이팬에 커피를 볶는 베트남의 여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국을 머금은 야생의 자연을 가공하며, 서로를 상상한다. 커피를 기르는 일이 비록 고단한 노동일지라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낭만이 깃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볶은 커피를 갈아 뜨거운 물을 붓는 행위는 하나의 제의 같아서 숙연해진다. 고요속에, 공기 중으로 향이 흩어지고 봉긋하게 솟아오른 커피 사이로 뜨거운 물이 흘러 내리며, 또르르~ 맑은 소리가 난다. 커피를 추출하는 행위와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만 남는다. 나는 사라지고 없다. 최고의 순간이다.
추출의 순간은 그러므로 서핑의 순간, 글쓰기의 순간, 섹스의 순간이다. 그렇게 내려진 커피는 달고 향기롭고 미묘하다. 아프리카가 혀 안으로 스미고 남미가 가슴을 파고든다. 자연이 내 심장안에 꿈꾸고 나는 향을 머금은 자유가 된다. 순간이 영원이 된다. 커피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