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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Jul 04. 2021

상식이라는 단어와 예속적 계약에 대하여

상식이라는 예속적 계약과 대중 그리고 광인(狂人) / 동상이몽(動想異夢)

생각을 움직여 다른 꿈을 꾸다, 동상이몽(動想異夢)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바라본 세상에 대한 시각을 담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요즘 들어 어떤 의심이 든다. 이 의심은 나로 하여금 내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을 거부하고, 이것들을 모두 논증과 검증, 그리고 탐구의 대상으로 올려놓게 한다. 그러나 기존에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면, 대체로 돌아오는 대답이란 보통은 「왜 그렇게 세상을 복잡하게 사느냐」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이 단순하지 않은데 어떻게 생각이 단순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하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란 보통은 가벼운 냉소일 뿐이어서, 나는 내가 병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세상이 병들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역사 속에서 당연한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루쉰의 경우만 고려해봐도 알 수 있듯 광인(狂人)으로 취급받았다. 그러한 광인(狂人)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사회의 낙인이란 때로는 무시무시해서, 중세 시대에는 죄 없는 한 개인을 마법을 쓰는 악인으로 둔갑시켜 화마(火魔)를 통해 그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지금은 중세 시대와는 달리 이른바 「마녀 재판」이란 일어나지 않는다고, 따라서 지금 사회는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며 보다 진보했다는 주장이 많지만 그러나 여전히 변한 것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다는 어떤 직관의 속삭임은 그것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기존의 질서나 금지에 대한 반발적인 감정으로부터 출발하는 분석과 통찰, 그리고 이의의 제기란 한 사회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이자 진보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여 이익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보통 체제의 운영에 깊이 관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므로 이러한 이의 제기를 저지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달려든다. 계몽 사상이 태동하던 18세기의 프랑스도 다를 것이 없어서, 계몽 사상가들에 대한 유럽 수도원의 공격은 처음에는 논박의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나중에는 논리적인 공격이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되자 이를 깨끗이 승복하기보다는 한 개인의 심성을 문제삼거나, 혹은 대중의 맹신을 역이용하여 다수의 논리로 그러한 소수 의견을 굴복시키고자 야심을 드러내는 지경에 이르렀던 바가 있다. 나는 문득 이 지점에 이르러 18세기의 프랑스가 현재에도 어떠한 형태로 재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들었지만, 그것은 아마 나의 착각이었으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질서의 유지를 명목으로 변화의 출발점이 되는 이의 제기를 차단하고자 하는 부류들은 이제는 자신들의 편리함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그러한 이의의 제기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열의를 올리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러한 착각의 연장선이었으리라. 추정컨대 그들의 속셈이란 다음 세대의 양육 과정에 그들의 야심에 찬 손아귀를 뻗어, 마치 그들의 논리가 일종의 복음이라도 되는 듯양 아직 판단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세대에 교리로서 전파시키거나, 혹은 그러한 판단의 능력을 아예 그러한 세대들이 가질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쓰고 있는 것만 같다. 그들은 어떤 생존과 직결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무기로 하여, 마치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란 죽음이냐 아니면 복종이냐라는 사실상 노예 계약과 다를 바가 없을 계약 속으로 누군가를 끝없이 밀어넣는 훌륭한 시스템을 아무래도 개발한 것만 같다.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이의의 제기란 곧 죽음으로 이어지는 아주 신속한 지름길로 간주되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대부분의 개인들은 결국 그 노예 계약과 다를 바 없는 부당한 계약에 따라 그들의 영혼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그런 망상에 문득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식」이라는 이름 하에 강요되는 계약이란 결국은 사회를 천천히 잠식하더니 이제는 모두를 마비시켜 어떤 사방이 막힌 철방 속으로 던져 넣고 그 방을 밀폐해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소리치는 어떤 목소리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었다. 대중은 그러한 목소리가 오히려 그러한 철방 속에 마비되어 죽어 있는 것이라며 입을 모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목소리는 아마 생각했을 것이라고 나는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목소리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수없이 들어보았던 바로 그러한 서사에 따라서, 목소리는 중세의 그 끔찍했던 기억과 같은 형태의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망상 속에서도 여전히 짐작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세상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나 또한 그러한 최후를 맞이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에 나는 문득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중세의 그러한 화형과 같은 끔찍한 신체형을 받는 것이란 이미 18세기의 유럽에서 출발한 바로 그 사상에 의하여 폐지되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으나, 그러한 끔찍한 형벌이 이제는 아마도 형태를 바꾸어 위장한 형태로서 나에게 점점 다가올 것이라는 그러한 불안감은 여전했다.


 나는 문득 그렇게 미쳐 죽어가던 수많은 역사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격리되기 위하여 끌려가던 수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소리친 것은 어떤 광기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광기에 대항하기 위한 절규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 모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반하는 것들임을 나는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아마도 마침내 정신병의 일종에 걸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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