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에서 멀어진다는 것
나이 든 한 남자가 있다. ‘에브리맨’이자 보석상의 아들, 형 하위의 동생 그리고 세 여자에게는 못난 남편, 그의 자식에게는 못난 아버지. 그는 여러 지위와 이에 따른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타인에게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비친다. 이 ‘에브리맨’도 그 시선을 의식한 듯이 변명을 잔뜩 쏟아낸다. 그가 가진 솔직함인 줄 알았지만, 사실 구색 좋은 핑계를 앞세워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자위하는 것만 같다.
그는 은퇴 후에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꿈이 현실이 되자 그는 이 행위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너 없이는 살 수 없어’라며 전 부인과 단단한 결속력을 보였음에도 다른 여자와 또 다른 사랑을 약속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때 의미 있던 것이 무용해지는 순간은 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 찾아온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위에서 언급한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충돌이 노년보다 일찍 찾아온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른 시기에 가족과 사랑이 가진 힘과 의미를 몰랐거나 경시했을 것이다. 그 결과 노년에 외롭게, 착한 딸 낸시와 형 하위 이외의 가족에게 버림받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그들마저도 노년에 찾아온 욕심으로 멀어졌다. 그럼에도 ‘자식 또한 아버지인 그를 잃었지만, 그 또한 자식을 잃었다’는 사실을 몰라주는 자식들에게 가지는 그 억울함 또한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그의 비도덕적인 행동은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소설에서 노년을 다룰 때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건강’에 대한 묘사는, 읽을 때마다 경험하지는 않았으나 경험한 것과 같은 공포를 준다. 나는 내일 당장 죽는 사람처럼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이기에, <에브리맨>의 담담하며 동시에 두려움이 가득 담긴 채로,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것을 서술하는 많은 부분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한때 완전한 인간이었던 사실에 이질감을 느껴 노후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 등등..
앞서 <에브리맨>이 한 노년의 남자가 여럿 핑계를 대며 그 인생을 감싸는 이야기라고 했다. 이 ‘노년’은 단순히 노화로 활기를 잃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시기, 아니면 상대적으로 특정 시간대보다 늦은 시기를 의미하는 경우 모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노년은 그 누구보다 변명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나의 손 안팎에서 벌어진 일을 향한 힘 빠지는 후회와 핑계로 말이다. 그것보다는 다른 무언가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생의 감사함으로 채워져야 하려나? 그게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의 변명은 자기합리화 이전에, 혼란스러웠던 유년 시절에 겪은 전쟁과 노년에 들어서며 점점 가까워졌던 종말을 맞이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라고 생전 자주 뱉던 이 좌우명이 그에게 다시 돌아와야만 할 것 같다. 나에게는, 이제 열여덟 살이 아니라는 사실에 50년 동안 울고 있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돌아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