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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인간의 앤터이자 인간인 한 남자의 이야기

by 커피우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영화에서는, 찬란하고 밝은 한 여자(마츠코)의 일생이 혐오스럽게 그지없는 나락으로 향하는 과정이 나온다. 마츠코는 남자들에게 사랑받고 버림받는 악순환을 반복하지만,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그들을 결국 사랑함으로써 용서를 행한다. 이런 그녀를 신이라고 칭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마츠코에게서 ‘요조’를 떠올렸다.


인간을 두려워하지만,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며, 결핍을 가진 인간에게 마음을 쓰고, 인간에게서 받은 고통을 인간의 사랑으로 해소한다.


<인간 실격>은 인간이 되지 못하는 한 인간 요조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인간이 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와 ‘인간에게 받는 고통’에 누구보다 더 괴로워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간에게 느끼는 동질감

인간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간에게 고통받지 않는다. 그들에게 일말의 기대감을 갖지 않으며, 그 존재의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요조는 인간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유하고 체험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지점은 동질감이다. 특정 인간에게서 동질감을 발견하는 순간, 그렇게 우스운 행동을 하며 자신의 속내를 숨기던 그가 음침한 음지의 본모습을 편히 드러낸다.

인간 세상에서 동떨어져 살며, 싸구려 냄새가 나고, 틀림없이 불행한 인간을 만나는 순간, 요조는 경계를 풀고 사랑을 품는다. 그러나 그가 참 안타까운 것은, 불행과 더 큰 불행이 만나 보통의 불행이 되고, 진흙탕 같은 곳에서 겨우 피어난 기적 같은 행복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간다는 점이다. 물론, 시즈코를 만나며 물적 지원을 받게 된 상황에서도 '돈이 떨어지면 연도 떨어진다'라고 했던 그의 말을 미루어 본다면,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행복이 옅어지는 것보다 스스로 번 돈으로 스스로 술과 담배를 살 수 없음을 더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인간에게 받는 고통과 환대

요조에게 고통과 동시에 환대를 안겨 준 인물로는, 담배 가게 직원 ‘요시코’가 있다. 그녀의 곁에 있을 때, 요조는 세상을 향한 경계심을 일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그가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순수함과 신뢰 덕분이었다. 그런 그녀가 겁탈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 요조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람을 경계할 줄 몰랐던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 떠안은 비애.
신께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신뢰가 어떻게 죄일 수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요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가 요시코를 나무랄 권리가 없었다기보다는, 요시코를 본인의 인생에 있어서 인간다운 삶으로의 방향성이자 답으로 설정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순수함이, 어이없게도 겁탈이라는 인간다움을 더럽히는 행위로 이어졌기에 신뢰와 죄를 연관 지은 것이라 생각된다.

평생의 행복을 바랐던 곳에서, 영원한 상실 또한 경험하게 된 인간의 모습은 정말 비참하다. 다케이치와 검사에게 자신의 가면을 들켰던 순간보다도 굴욕적이다.

이렇게까지 인간에게 고통받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는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가 생각해 보았다. 표면적으로는 인간의 앤터였으나 가장 인간다웠던 ‘요조’를 조명하는 것이 <인간 실격>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다운 것이 무용해지는 사회에서, 비인간적인 것과 홀로 싸우는 이들을 조명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사회 곳곳에 잔재해있는 위선과 죄악의 앤터를 쫓는 것에 대한 노고를,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된 요조를 통해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작중에서 '외롭다', '괴롭다'는 표현은 요조를 주체로 하여 자주 사용된다. 불행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인간다운 사람만이 외롭고 괴로워하면서도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인간이 요조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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