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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우유 Aug 21. 2024

영화 <올드보이>

복수의 무의미함

https://www.youtube.com/watch?v=ekWhDE1QagQ

심현정 - The Last Waltz를 듣고 혹은 들으며 이 글을 읽기를 바라며

(참고로, 위 곡은 영화를 가장 잘 담아낸 한국영화 OST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복수는 박찬욱 감독의 상징적 원동력이다. 복수 3부작이라고도 불리는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는 한 개인의 다른 개인을 향한 복수라는 메인 플롯 하에 인물들이 행동을 시작하고, 죽임 혹은 죽임으로 끝을 맺는다. 이번 글에서 다루는 <올드보이> 또한 이유 없이 자신을 가둔 이우진에게 복수를 하는 오대수의 이야기이다. 복수는 일방적인 경우보다, 양방에서 발생할 경우 그것의 의미와 이해관계가 더욱 깊어진다. 박찬욱이 오대수와 이우진을 통해 복수에 대한 복수극을 어떻게 그려 냈는지 이우진과 오대수의 인물 설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복수를 시작하는 자 – 이우진

 이우진의 사랑은 그의 약점이 된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그의 ‘자신의 친누나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설정은 오대수를 향한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로 전환된다. 자신의 약점을 상대에게 들켜 복수를 하는 것은 클리셰적이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 설정에 모호함을 추가하여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두었다. 이우진이 다리에서 누나의 손을 자의/타의로 놓았는지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우진은 단순히 오대수에 대한 증오만으로 복수를 시행하지 않는다. 오대수 스스로 자신이 복수를 당하게 되는 이유를 깨닫기를 원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오대수라는 주체에 대한 원한보다는, 자신의 상황(친누나와의 사랑을 이어갈 수 없었고, 그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일까지 겪어야 하는 상황)을 비난하기 위해 오대수의 행동을 화풀이의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복수를 끝내는 자 – 오대수

 오대수는 위에서 언급한 이우진의 상황으로 복수를 당하게 된다. 엄연히 보았을 때, 이우진의 약점은 오대수가 아닌 오대수의 친구(이우진과 그의 누나가 교실에서 어울리는 모습을 오대수에게 알렸다.)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제3자(관객)의 입장에서 비롯된 해석이며, 박찬욱은 복수의 주체인 '이우진'으로 하여금 복수의 계기를 오대수에게서 찾게끔 설정하였다. 오대수는 딸을 가진 아버지라는 설정으로 인해, 이우진의 복수가 원활히 진행된다. 


 또한,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자 소시민인 오대수의 위치는 비 오는 날 딸과의 전화부터 혀가 잘리기까지의 과정에서 비극성을 부각한다. 오대수의 신체 절단은 오대수의 실수와 이우진의 복수의 시발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관객은 이우진의 복수의 핵심이, 자신의 약점을 본 오대수가 아니라 이를 여러 사람에게 알린 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오대수는 상호 소통을 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혼자 15년을 갇히게 하고, (의도적으로 풀어주었지만) 탈출 후에도 일반적인 어투로 대화하지 못하게 된다. 


     

복수의 의미 – 복수의 동기를 중심으로

 이우진이 행한 복수의 주요 요소는 근친상간이다. 다수의 국가와 한국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요소이다. 박찬욱은 근친상간의 자극성을 단순히 인물 설정에 소비하지 않고, 오대수와 이우진의 접점과 마침표(파멸) 구성에 정교하게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근친상간에 초점을 두지 않고, 한 개인의 복수와 행동이 다른 개인을 얼마나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오대수에게도 근친상간을 행하도록 설계하여, (근친상간의 사회적 통념을 배제하고 생각했을 때) 역으로 이우진의 근친상간(사랑)이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관계임을 보여주었다. 

 

 결국 혀가 잘린 오대수, 총으로 자살한 이우진의 마지막을 보여주며 박찬욱을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였을까. 그 둘이 신체가 절단되고 생을 마감하여도, 오대수와 딸의 근친상간과 이우진 누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감독은 ‘이우진과 오대수의 복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라는 답 없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진다. 




 이우진과 오대수의 인물 설정을 중점으로, 박찬욱이 <올드보이>에서 복수를 풀어낸 방식을 정리해 보았다.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근친상간과 복수라는 자극적 요소를 담은 스릴러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박찬욱은 극 중 이우진처럼 관객들을 두 남자가 행한 복수의 또 다른 가담자가 되게끔 설계해 내었다. 그렇지만, 두 남자의 복수극에 타당성을 판단할 기회를 주지 않고, 결론적으로 (판단 가치가 없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강조하며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박찬욱의 인터뷰에 따르면, 오대수는 정말로 기억을 잃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오대수의 기억은 휘발되었다고 생각한다. 굳이 최면술사의 유도 하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괴로운 기억을 지운 것이다. 오대수의 기억 상실은 이우진의 입장에서는 인생을 건 복수가 무의미해지는 결과이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복수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박찬욱의 의도에 부합하게 된다.



이 글을 읽고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오대수의 기억은 잔재하는가, 휘발되었는가.

복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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