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천을 따라 산책할 때가 있었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당장에 찾아갈 수 있는 자연 속으로 들어가 몇시간이고 걸었다.
고여서 썩어버린 생각을 아무데나 토하고 비워내도 자연은 군말없이 받아줬다. 괜히 툴툴대며 흙을 발로 차기도 하고 애꿎은 나뭇가지를 노려보는 삐뚫어진 취객한테도 자연은 끄떡 없었다.
자연은 결코 고여 있는 법이 없다. 물결이 흐르고 바람이 날고 새들이 부지런히 물어가면 어느새 모든게 정화 되어있다.
한동안은 새벽산책을 즐겼다. 귀에 음악을 꽂지 않고 조용한 적막을 즐기며 내 발자국 소리, 잎사귀들이 부딪히는 소리에 가만 가만 집중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져있었다.
한바탕 토해내고 받아낸 이 한 줌의 생기로 내일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한동안 사람에게 지쳐있었다. 자연과 달리 사람은 블랙홀 같았다.
고였는지 흐르는지 모르겠는 그 시커먼 속내가 꼴도 보기 싫었다. 내 생각과 감정은 물론 시간까지 집어 삼켜지는 것 같아 어두운 회의감에 가득찼었다. 그 때의 내 주변 사람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날은 막차를 타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몸이 무거웠는데 사람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마음은 더 천근만근이었다. 피곤한 몸을 얼른 뉘이고 싶다가도 그래도 마음은 씻고 가자 해서 일부러 몇 정거장 전에 내려서 천을 따라 주욱 이어진 산책로로 향했다.
자정이 넘어 새벽 한시로 향하는 시간.
산책로에서 조금 떨어진 가게에서 나는 소리 말고는 역시나 고요했다.
아, 좋다.
숨을 크게 쉬고 터벅 터벅 집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등에 메고 있는 백팩이 자꾸 거슬렸다. 오늘따라 뭘 그리 많이 집어넣었는지 양 어깨를 파고드는 가방끈도 너무 아팠다.
얼른 가야지
집에 가서 나를 옥죄는 이 가방을 집어던지고 손씻고, 발 씻고 푹신한 침대에 눕고 싶다.
집은 왜 이렇게 멀어... 오늘은 걷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갈걸.
어느새 후회로 가득차 있었다. 졸졸 흐르는 천 소리도, 잔머리를 흔드는 바람도 느낄 새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 스멀 스멀 어둠이 몰려왔다.
달그락
그 때 바로 뒤에서 낯선 소리가 났다.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저 멀리 있는 가게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하며 잰 걸음을 걸었다.
달그락, 달그락
쇠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분명 들었다. 바로 뒤였다. 뒤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괜히 인적 드문 시간에 가로등도 적은 산책로를 택했나 하며 침을 삼켰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 맺혔다. 조금만 더 걸으면 상가가 즐비한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나올 것이다.
달그락,달그락,달그락
내 속도와 소리가 똑같이 빨라질수록 새벽의 짙은 어둠이 더욱 거세졌다. 목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마음의 결단을 내려야 했다. 따라오는게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급소를 걷어찰 것인지, 아니면 통로까지 전력질주를 할 것인지.
블랙홀 속에 있는 기분을 느끼며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뒤를 돌아보았다.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백팩이 휙 돌아갈 정도의 속도였다. 그리고-
덜그럭!
눈 앞엔 짙은 흑색의 나무들이 즐비해있었고 뻥 뚫린 산책로가 보였다.
아무도 없었다.
문득 가방 속 텀블러가 스쳤다. 이내 잘 들고 다니지 않았던 아이패드도 떠올랐다.
흘러내린 백팩을 추켜 올렸다.
덜끄럭!
빈 산책로에 울려퍼지는 청아한 소리에 헛웃음이 번졌다. 있지도 않은 허상에 홀로 좇긴 꼴이 웃겼다. 내 원맨쇼의 관객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다시 터벅 터벅 걸어 집으로 향했다. 정신이 돌아오자 바람에 흩날리는 짙은 빛의 구름도 서서히 보였다.
주변 사람을 볼 때 어쩌면 내 생각에 갇혀 집어 삼켜졌던 것 아닐까? 내 스스로가 블랙홀을 자처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혹 누군가에게 내가 어두움이 되고 있던 건 아닐까?
자연 속에 토해내지 못할 온갖 물음표가 떠올랐다.
답을 찾은 건지 아닌지 모를 끄덕임이 나왔다.
그래. 뭐 기회가 닿는다면 대화를 시도해볼까? 그 사람의 속사정을 내가 놓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 사람도 내 속사정을 모를 수도 있고.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리엔 온갖 생각으로 가득찼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한결 가벼웠다.
뭐, 어쨌든 우선 새벽 산책은 당분간 자제하자.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