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맛, 탯줄 자르기

자아성찰

by 겨울해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애기가 된다는데 그게 조금은 실감난다.


우리 아빠가 이 말을 들었다면 고작 30대가 뭐 그러냐 하겠지만 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걸 뭐.


아니지, 지금의 아빠는 그러지 않으려나.


요즘 우리 아빠가 변했다. 멋있어졌다.


내 생각을 가로막거나 판단하거나 하지 않는다. 또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의견을 가장한 설교를 여전히 길게 늘어놓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짧아졌다. 조금만 숨을 참고 아빠의 말 속에서 필요한 것만 쏙쏙 골라내본다. 그러다 3절 이상 반복되면 비언어적 표현으로 제지해본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욕이다라는 말은 딱 우리 아빠에게 해당된다.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면 이젠 그래도 멈춰준다. 때론 내 표현에 아빠도 기분이 상할 때가 있지만.


어쨌든 변해버린 아빠를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빤 "늙으며 애기가 돼. 그러니 네가 좀 받아줘야 해." 라고 종종 말한다.


그러면 나는 관심과 사랑을 표하며 우리 애기의 투정을 기꺼이 받아준다. 더 이상 아빠는 고집과 아집으로 꽉 막힌 채 세월만 흐른 중년의 남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빠가 변해버린 후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합의된 변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부턴가 아빠가 스쳐지나가듯 종종 입을 뗐다.


"애들한테 너무 못해준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귀를 의심했지만 이후로도 몇 번 더 그랬다.


"내가 너무 융통성이 없었어. 애들을 믿어주고 잘하는 것은 칭찬을 좀 해줬어야 하는데."


뭐 대충 이런 말이었다. 그런데 이 고해성사가 내가 느끼기엔 매우 적절치 않은 타이밍이었기에 처음엔 역효과였다. 다른 주제의 이야기 속에 툭 던져진 아빠의 고백은 마치 끼워파는 상품 같이 느껴졌다.


일방적으로 사과하고 혼자 구원 받는 것 같아 울분이 치솟았다. 아빠의 양육 방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게 내 인간관계나 성격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 상대방 마음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그저 아빠 혼자 진행시킨 자기반성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악역에서 빠져나가려는 아빠가 미웠다.


그러나 아빠는 점점 달라졌다. 그런 아빠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젠 내가 악역이 되는 꼴이었다.


아빠 마음 통역사인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겨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래, 너무 많이 지나간 감정들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 낼 수도 없는거야. 우리 가족은 현재에 집중해야 미래가 바뀔 수 있는거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빠의 눈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나도 점점 애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한 애기 자아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왔다. 애기가 뭘 알겠는가. 애기는 다 커버린 성인의 미뤄뒀던 감정들을 그저 잡히는대로 던져댔고 또 먹어댔다.


불안해!

무력해!

무기력해!

무서워!

두려워!

우울해!

화나!

혼란스러워!


애기는 나를 참 미성숙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유쾌함과 낙천성까지도 뺏어갈때면 너무 슬퍼 견딜 수가 없었다.


매일 술 한잔씩 기울이며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고 하루를 견뎌내며 하릴 없이 시간만 죽였다.


따지고 보면 어떠한 큰 사건도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 사실이 날 더 몰아붙였다. 참 보잘것 없었다.


그저 오랜기간 응집된 무언가가 속에 있는데 이걸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자신도 없었다.


상담도 주변 사람도 나에게 뾰족한 수를 제시해주지 못했다. 가끔은 그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는거라며 지나온 인생과 현재를 재단받았다.


나는 잠시 멈췄다.


때론 시간이 해결해주는 문제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얌전히 하루하루를 죽였다. 살기 위해 오늘을 죽인 꼴이었다.


그래도 기다려.

밑바닥을 봐야 위가 있다는 사실도 아는거야.


어느날 문득 적당한 힘이 생겼다. 바람을 느끼고 햇빛에 설레어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에 있는 애기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애기가 소리지를 때마다 잠잠코 있었더니 퇴화한 모양이었다.


애기는 양수 속 태아의 모습이었다.


손가락을 빨며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깊은 양수 속에서 태아가 꿀렁일 때마다 거대한 탯줄이 함께 흔들렸다.


탯줄은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엄마도 아빠도 아니었다.


어느새 기존의 탯줄은 잘려있었다. 잘려나간 곳의 상처를 보며 더 이상 원망하거나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함이 실감되었다.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넌 할 수 있어.

널 믿어.

괜찮아, 그럴 때도 있는거야.


태아가 손을 꼬물 꼬물 거렸다.


이제서야 내 자아를 본다.


사실 그 동안에도 끊임없이 보았을 것이다.

다만 자아성찰에는 끝이 없는 게 맞을 뿐.


불교에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것이 있다.

위(vi)는 나누다 분리하다, 빠사나(passana)는 관찰이란 뜻으로 '통찰'이 핵심이다.

바꿔 말하자면 마음 챙김, 즉 알아차림이자 명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현상을 순수하게 관찰하여 있는 그대로의 나와 이어진 세계를 바라보는 것.


불자가 아닌지라 그 깊이는 잘 모르겠으나 이 지혜는 언제나 울림을 준다.


자아를 순수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을 느낀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비로소 수십년 전에 태어났던 누군가의 딸이 아닌 현재의 내가 보이는 듯 했다.


애기가 참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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