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해 Apr 05. 2021

[k의 기록] 8. 윗집은 공사중이니 양해 바랍니다.

층간 소음


꿈에서 쥐가 벽을 갉아 댔다. 두터운 앞니와 날카로운 손톱으로 갈짝 갈짝 거리며 시멘트와 나무를 파대길래 물어봤다. 그렇게 파면 재밌니? 그런데 고 작은놈이 내 말엔 대답도 않고 더 열심히 파는 게 아닌가. 갈짝 갈짝 거리는 소리는 글쩍 글쩍으로 또 긁긁긁 거리더기 쓱싹쓱싹 드르륵 두루루루루룩 으로 바뀌고 나는 눈을 떴다. 오늘도 윗집에서는 싱크대 공사하는 소리가 들렸고 오늘은 일요일이었고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다.


나는 꽤 심한 저혈압이다. 그래서 아침 컨디션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그리고 그 컨디션을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윗집 공사 소리 때문에 내내 망치고 있다. 습관적으로 명상 음악을 틀었지만 드릴 소리에 파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친구들은 그거 너한테 결투 신청하는 거야 하면서 놀려댔지만 나는 결투 신청을 받아주러 갈 수가 없었다.


이미 몇 년 전에 한 번 치렀던 결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다다다드르륽쿵쿵콱쾅지이잉퓌이이잉뚝딱뚝딱




사건의 시작은 똑같았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윗집 공사 소리가 신경에 조금씩 거슬리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방음이 썩 좋지 않은 빌라였다. 그래도 오후 시간대였기에 이해했다.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쿵쿵 대는 망치 소리는 참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견뎠다. 곧 끝나겠지 싶었던 공사가 금요일까지 이어지자 살짝 불안했다. 당시 나는 오전 카페 알바를 하면서 저녁에는 또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부족한 상태여서 꿀 같은 주말만 기다리는 시체였다. 설마, 주말에도 공사를 하겠어? 안 하겠지.


토요일 아침.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참았다. 저 정도의 소리로 이 시간부터 하는 거면 정말로 오늘 끝나겠구나. 며칠부터 며칠까지 공사합니다 양해 바랍니다 라는 쪽지 한 장 없는 윗집의 비매너도 그래서 참았다. 그래, 일찍 눈 뜬 김에 밥이나 먹자. 내일도 쉴 수 있는 주말이잖아. 신난다.


...쾅. 쾅. 쾅. 쾅 푸우우우우우웅 지이이이이잉.

핸드폰을 확인하니 7시. 정말로 일요일 오전 7시였다. 귀마개로 귀를 막았다. 자야만 한다. 부족한 잠을 채우지 않으면 분명히 하루 종일 어지러울 것이다. 귀마개 너머로 집주인 아저씨의 걸걸한 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내 인내심의 끈이 살짝 팽팽했다. 참자. 너무 시끄럽지만 않으면 잠은 잘 수 있겠지투다다다다다닫투다다다다닫퓌이이이이이잉지이이이이잉. 30분간 흔들리는 것 같은 천장을 노려보며 무의미한 번뇌를 해본 결과, 따지러 가기로 했다. 조용히 일어나 현관문 앞에 섰는데... 이게 무슨 냄새지?


담배냄새였다. 맙소사 하며 이마를 칠 때, 함께 사는 친구 방에서 콜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결핵에 걸려 고생하다가 막 퇴원한 룸메이트였다. 나는 이건 정말로 아니다 싶어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에 흘러넘치고 있는 자욱한 담배냄새가 내 분노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계단에 오르자 펼쳐진 상황은 이랬다. 한 세대가 거주하는 위층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집주인이 페인트 통을 깔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내부 공사를 하고 있는 아저씨들과 뭐라 뭐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저씨


전기톱인지 뭔지 때문에 바로 옆에서 부르는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저씨!!


집주인은 웬 파리가 앵앵거리지 하는 표정으로 내 쪽을 봤다. 이윽고 푸석푸석한 얼굴의 꼬질꼬질한 세입자를 발견한 집주인이 안에 있는 분들에게 잠깐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그의 손목에는 항상 금팔찌와 금반지, 금시계가 있었는데 그의 손짓과 함께 찰랑거렸다.


"무슨 일이야, *호 아가씨~?" (*호는 내 빌라 호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입니까.

"(그제야 내가 무엇을 요구하려는지 깨달은 듯) 아아, 미안해. 빠르게 공사 끝낼게. 좀만 참아줘, 응?"

오늘만 이런 게 아니잖아요. 지금 며칠 째예요 대체.

"(웃으며) 지금부터 하면 곧 끝나~  양해 좀 해줘~"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하며) 그러면 적어도, 9시부터 시작하시면 안 될까요? 너무 이르잖아요, 시간이.

"(속삭이며) 저 사람들 시간 넘기면 돈을 더 받아. 그래서 급하게 진행하느라 그래. 아가씨가 이해 좀 해줘~ 응?"

(기분이 상하며) 아니, 사전에 양해를 구하는 쪽지도 없이 휴일 아침부터 이러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나가!! 내 건물에서 내가!! 공사를 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가씨 공간은 아가씨가 돈 낸 *호 거기 하나야! 왜 여기 와서 난리야 난리는! 나가!!"


내 이성의 끈은 여기서 끊겼다.


담배 끄세요!! 제 룸메 폐결핵인데 문제 생기면 피해보상 신청할 겁니다!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지금 내뱉은 말, 후회하지 마세요.

"(손을 저으며, -그때마다 금팔찌가 찰랑찰랑거렸다.) 내려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이번 공사에 대해 사전에 어떤 공지도, 양해도 받은 적 없습니다.

"(담배를 꺼내며) 아가씨, 우리 나중에 얘기합시다."

담배 꺼내지 마세요. 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무의미한 실랑이가 이어지자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나는 '오늘 일로 문제가 생길 시 확실하게 피해보상 신청할 거'라는 말을 던진 후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룸메이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소리 내서 미안하다, 괜찮으니 들어가 쉬어 라고 말 한 뒤, 나도 내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분이 쉽게 삭히질 않았다. 입가 양 옆으로 고인 침을 튀기며 나에게 소리 지르는 집주인의 표정, 고함지르는 입 속에 보이는 금니, 검은 재를 떨구는 담배와 연기, 모든 이미지가 선명하게 자리 잡혔다. 그리고 집주인이 던진 말이 수많은 공사 소음 보다도 더 시끄럽게 내 속을 후벼 팠다. '여긴 내 건물이고 아가씨 공간은 *호 거기 하나야!' 말 한마디에 나의 존재가 몇 평짜리 방 한 칸으로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윗 층에서 공사 소리가 조금씩 다시 들리기 시작한 건 오전 9시가 넘어서였다.


태초에 땅 덩어리는 사람 것이 아니다.




며칠 뒤, 복도 한편에 못 보던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너무 구석에 붙어 있어서 하마터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죄송합니다 월요일 *층 하자 공사가 있사오니 양해 부탁합니다. 금방. 끝남니다.'

집주인이 직접 쓴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적혀 있는 에이포 용지를 보고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 일이 있고 언젠가 건물 앞을 쓸고 있는 집주인과 눈이 마주쳐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넸지만 집주인은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나도 집주인도 쓰라린 상처만 안게 된 결투였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 일어난 위층 공사. 1층 입구 문에 종이가 떡하니 붙었다.

'실내 리모델링. 상기 작업으로 인하여 이삼일 소음으로 인하여 불편을 드리게 된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삼일이 아니라 일주일 넘게 공사하는 소리가 아침 7시, 8시, 9시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저혈압인 나는 아침 컨디션이 엉망인 채로 일어나 무선 이어폰을 끼고 명상음악을 틀어버리며 그럭저럭 견뎌내고 있다.




대체, 왜 윗 집은 세입자가 나갈 때마다 공사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공사가 시작된 이후로 집주인 아저씨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낮이나 밤이나 늘 건물 주변을 맴도셨는데 나와의 한판 이후로는 금팔찌의 찰랑거리는 소리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승자 없는 결투가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 또 일일이 이기려고 달려든다면 몸과 마음이 성할 날이 없을 것이다. 서로가 조금씩은 물러나 주는 것. 그게 세상 살아가는 전략인가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k의 기록] 7. 새로 탄생할 아이러니함들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