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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Jan 13. 2022

[k의 기록] 10. 합정역, 구원 받을 이

사람과 사람



합정역 7번 출구 계단 아래에 간혹 보이는 분이 있다. 뉘인 목발 옆으로 나뭇가지처럼 쭉 뻗은 한쪽 다리, 그 반대로는 다소곳하게 접 다리로 앉아있는 그분 옆에는 늘 낮은 통이 하나 놓여 있다. 하루 종일 그분의 경제활동을 책임 질 그 통은 누군가가 놓아준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보는데,  안에 담길 지폐와 동전들을 그분이 꺼내기엔 애매한 거리 덩그러니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도 가끔 통 안에 있는 만 원권이나 천 원 뭉에도 무심한 그의 태도가 내 상상력에 확신을 더해준다. 누가 그를 거리로 내았을까. 그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어쩌면 스스로의 선택일 수도 있는데도 내가 뭐라고 감히 그의 인생을 쉽게  짐작해고는 털어낸다.


그분은 늘 누가 지나가든 말든 성경책을 펼쳐놓고 한 절 한 절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다. 그의 몸은 연신 앞뒤로 흔들렸는데 그건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집사님, 권사님들은 몸을 앞 뒤로 흔들며 열심히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하셨다. 간절함과 은혜로움이 뒤섞인 경건한 오뚝이 같은 그 전체적인 이미지가 내게는 꽤 강렬해서 교회에서도 종종 실눈을 뜬 채 그들을 훔쳐보곤 했다. 그 행동은 누군가 주입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정서에서부터 파생된 자연스러운 동작이자, 마음에서부터 넘쳐흐른 간절함이 들어 낸 염원의 몸짓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그토록 갈망하고 믿는 그들에게서 경외심 느꼈는데 같은 느낌을 합정역 7번 출구 밑에 있는 그에게서 받았다. 깊게 파인 주름 사이에서 흔들거리는 그의 흰머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곳은 깊은 계단 아래 지하도였는데도 말이다.


그에게 있어 구원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일까. 나는 예수님을 쫓아간 열두 제자 같은 심정으로 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핑계로 다가갈 양으로 그의 앞을 지날 때마다 느린 걸음으로 알짱댔. 그러나  그는 성경책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을 펼친 채로 주변에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 번은 누군가가 통 안에 돈을 두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때도 그는 흔들던 몸만 경쾌하게 흔들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반동으로 흔들리던 고개가 그만의 감사인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왜 이렇게 그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했냐면 뭐라 정확히 짚어낼 순 없지만 그의 풍경이 내 시선을 뺏었다. 은 지하도 입구에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사이에 꼬부라진 모습으로 앉아있는 그. 두꺼운 성경책, 그리고 독 깨끗한 그 목발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데 저 발이 그의 한쪽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기엔 너무 길지 않나. 다들 바삐 제 길을 가는데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좀처럼 떼질 못했다.


처음엔 호기심이었고 이윽고 밀려오는 같잖은 동정심. (실제로 나는 그에게 얼마의 돈도 건네본 적이 없다.) 그다음엔 어떤 존경심. 그 존경심의 정체가 뭘까 당시에는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당시 나는 눈앞에 놓인 일들에 허덕이며 잰걸음을 재촉하던 시기였다. 정신과 마음은 정리가 하나도 되지 않았었다. 안 꺼진 창이 여러 개 켜져 있는 노트북 같았다. 작고 소중한 커서 하나를 이리저리 흔들며 일이 해결되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를 애써 지탱하던 중이었다.


그를 처음 마주한 날, 나는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다리에 어떤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해결할 일이 있는 목적지로 얼른 가야 한다는 생각이 날 이끌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반대쪽 발을 내딛고...라는 주입식 기능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대로 가라앉지 않았을까.


삐뚤빼뚤 걷고 있는 내 걸음은 위태로웠다. 분명 중력이 있으니까 무게가 질질 끌리는데 한 편으론 무중력 존에 들어선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였다. 오, 새로운 감각이야. 하면서 좀비처럼 걷고 있다가 그를 발견했다.


긴 목발. 성경책. 그리고 그의 모습에 분명 나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나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그는 튼튼하게 기댈 또 하나의 다리도 있었고, 바라고 염원하는 것도 명확했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해서 제 기능을 못하는 다리가 두 개였고,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치 않기에 똑바로 걸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보며 내 삶의 중력을 재 탐구했다. 나는 치사하게도 혼자 그렇게 그에게 무언갈 받았다.


내가 그에게 느낀 존경심은 성경책 위로 오뚝이같이 몸을 흔들며 절실히 갈구하고 바라는 힘에 대한 것 같다. 나는 집에 가서 그가 보던 장을 떠올리며 성경책을 뒤져보았다. 그리고 그를 위한 기도를 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한계시록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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