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게 약, but 알고 싶은걸
통영에서 포항에 막 도착했을 때는 배가 너무너무 고팠다. 죽도시장 안 쪽에 오늘 묵을 게스트 하우스가 있었고 아직 입실 시간 전이었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고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간 여행이었기에 포항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죽도시장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랐는데 알고보니 죽도시장이 동해안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의 머릿속엔 죽도시장이라는 키워드보단 ‘밥,밥,밥’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묵직한 배낭을 메고 미로 같은 시장을 돌아다니며 밥집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날이 시장 전체 휴무날이었는지 문을 연 집들이 의외로 많이 없었다. 이렇게 넓은데 내 배 채울 만한 곳이 없을까 싶어 당황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골목 사이를 요리 조리 탐색했다. 간혹 장사 중인 칼국수 집이나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무조건 밥심이었다.
그러다가 한 아저씨가 좁은 골목에 위치한 백반집에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차림새로 보아 동네 주민인 것 같아 저기가 바로 로컬 맛집이겠거니 하며 잽싸게 따라 들어갔다.
꽤나 옛스럽고 정겨운 식당 풍경을 보며 앉자마자 가격을 보고 놀랐다.
백반이 5000원이었다. 내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 물가를 보고 있는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이었다. 구성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니 일단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무거운 배낭부터 내려놓았다.
식당 입구에 앉아 과메기를 연신 굽고 있는 아주머니와 꽃무늬 철제 원형 상에 반찬을 담고 있는 할머니가 주인 인 듯 같이 일하고 있었다.
“백반 하나 주세요.”
오픈된 주방에 계시는 할머니께 주문을 넣고 잠시 기다리며 목을 축이는데 상이 금방 나왔다.
맙소사.
보자마자 입이 떡 벌어졌다.
이만큼 푸짐한 음식이 단 돈 오천냥이라니! 도저히 말이 안되는데... 와… 포항, 좋은 곳이잖아! 배고픈 여행객의 마음이 저항없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찬 넣고 비벼 먹어요.“
할머니는 친절한 말을 우악스럽게 던지고는 주방으로 돌아 가셨다. 그러고보니 상마다 고추장과 참기름이 놓여 있었다. 밥이 담긴 대접에 반찬을 넣고 비며 벅는게 백반 집의 암묵적 룰인 듯 했다. 여러 나물을 먹을만치만 넣고 된장찌개도 한 수저 넣어 촉촉하게 만들어 준 다음 슥슥 비벼서 크게 한 입 넣었다.
그래, 이거지! 한국인의 맛!
절로 나오는 감탄을 연이어 뱉으며 놓여있는 과메기도 한 입 베어물었는데 눈이 번쩍 띄었다. 이게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었구나! 고등어와 삼치같은 통통한 등푸른 생선만 추구했는데 이렇게 살이 얇은 생선도 맛있다니...!
역시 사람은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한다며 혼자만의 철학에 감동받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상에, 게다가 이 큼직한 과메기는 한 마리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푸짐한 구성에 또 한 번 감사함을 표하며 갈비 뜯듯 야무지게 뜯어 먹었다. 양이 꽤 많았지만 남기고 싶지 않아 남은 밥과 반찬도 싹싹 긁어 먹었다. 홀쭉했던 배가 순식간에 남산만해졌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한결 느긋해진 마음으로 이 놀라운 맛집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식당 안에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며 소주 한 잔을 하고 계시는 아저씨 그리고 여행객인 듯한 중년 부부가 있었다. 중년 남성은 맛있다며 감탄을 내뱉는데 아주머니는 뭔가 조금 아쉽다는 듯 나물에 대한 첨언을 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집에서는 이렇게 못 먹잖아.’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고 이윽고 한 톤 올라간 중년 여성의 대답이 이어졌다.
투닥거리는 중년 부부의 대화를 뒤로 한 채 언젠가 다시 방문할, 이미 내 마음 속 단골집이 되어버린 백반집을 조금 더 둘러 보았다. 식사는 진작에 끝냈지만 배가 너무 불러서 바로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러지 말걸 그랬다.
쓸데 없게 면밀히도 관찰한 내 눈을 탓했다.
단골 손님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가자 할머니가 상을 치우시는 게 보였다. 그리고 빈그릇을 싱크대에 넣기 시작했는데 가득 채워져 있는 그 물 색깔이 내 눈에 들어왔다. 고춧가루,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는 그 물은 짙은 주황색 같기도 하고 어두운 회색 같기도 한 끔찍한 혼합색이었다.
애벌 설거지용 물이겠지 하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백반집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행히도(?) 남은 반찬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시더니 빈 그릇들을 혼합색의 물로 벅벅 닦으셨다. 그리곤 그 옆 싱크대에 있는 물로 한 두 번 대충 헹구고는 선반 위에 그릇을 올리기 시작하셨다. 그 옆에 있는 물 색은 불행하게도 앞 전 물 색과 비슷했다. 그래도 조금은 더 맑은 혼합색이라는 것…?
분명 비위가 강한 편이었는데 야속하게도 세월 따라 약해진 위장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은 과메기와 나물들이 꺼내달라고 속에서 아우성 치는 기분이었다.
얼른 배낭을 들춰메고 계산을 하러 일어섰다. 그래도 이렇게나 저렴한데 카드로 계산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 해 만원을 내밀었다. ‘계산할게요.’ 라는 말을 들은 할머니는 끔찍한 혼합색의 물에 손을 한 번 헹구시더니 브릭색의 정겨운 김치통에서 잔돈을 꺼내 주셨다. 약간은 축축하게 젖은 오천원짜리 뒤로 보이는 싱크대의 풍경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드린 뒤 백반집을 나왔다.
방금은 일단 1차 설거지를 마치신거야.
나 좋을대로 내린 결론을 중얼거리며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았다. 부른 배도 소화시킬겸 영일대 해수욕장까지 걷자 하며 다시 상쾌한 여행 기분을 내보려는데 옆으로 보이는 항구의 파도들이 자꾸만 싱크대의 출렁이는 물로 보여서 속이 자꾸 울렁거렸다.
아아- 방금 원효대사 해골물을 마셔버렸구나…
분명 같은 물이었지만 그건 밤에는 너무나 달고 맛있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썩은 해골물이었다. 밤에 마신 물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모든 걸 토해낸 원효대사의 깨달음이 괜찮다며 나를 위로 해주었다.
[행복은 결국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한 차례 토한 뒤인지라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으셨던 것 아닐까...?
어쨌든 참말로 맞는 말이다. 모든 일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나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 맑은 하늘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편한 속을 순환시켜주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보니 요즘 내 마음가짐은 어땠더라?
그간 밤같은 어둠에 숨어 ‘아 몰라’하고 지냈는데 어느새 수면 위로 올라온 태양이 해골 안쪽까지 비춰주는 상황들이 많았다. 보이지 않았던 민낯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때론 불편하고 가끔은 부끄러워졌다.
흔히들 현실을 알고 타협하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던데 쉽진 않다.
알지 못할 때야 어린애 마냥 신날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만큼 설레는 건 없으니까.
하지만 알면 알수록 세상은 냉정했고 나는 비겁한 겁쟁이였고 사람들은 각자 너무 달랐다. 하나 둘 깊이 파고 들수록 순수한 본질을 지키며 사는게 무척 어렵다고 느낀다. 심지어 삶, 그 자체만으로 버거울 때도 더러 생겼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니체의 말이다.
가만히 마음 속 심연을 들여다보면 처음엔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일정시간 지나면 익숙해지다 못해 편하기까지 하다. 무슨 짓을 하든 어둠이 가려주기 때문에 현실로부터 도망치기에 매우 용이하다.
‘나는 이렇게 자랐으니 이럴 수 밖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외롭고 고독함을 달래려면 어쩔 수 없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술을 마시거나 폭식하거나 등등으로 타협하는 건 너무나도 쉽다. 하지만 어둠 속 해골물은 당장의 갈증은 없애주겠지만 결국엔 몸도 마음도 병들게 만든다.
하필 내가 간 동굴에, 그것도 해골에 물이 담겨 있냐며 상황을 탓하다가 결국엔 부주의했던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것도 이젠 그만하자.
언제까지고 눈 가리고 아웅한 채 정체 모를 해골 물에 의지할 수는 없다.
나는 더 행복하고 싶다. 삶을 조금 더 희망차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다.
원효대사처럼 깨달음을 입 밖으로 내뱉어본다. 행복은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연거푸 마셨던 내 삶의 해골 물의 정체를 찬찬히 바라본다. 맑은 햇빛에 잘 말린 어둠은 더 이상 맛있어 보이지 않았다. 고여 썩은 것들은 버려주면 되는 거였다.
도착한 영일대 해수욕장은 생각보다도 더 멋졌다. 고운 모래와 맑은 날씨에 온 몸을 맡기며 다짐했다.
원효대사 해골물 맛을 잊지 말자. 내 마음 가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니까 오늘 시장에서 먹은 백반의 맛있는 감동만 기억하고 행복할거다.
후, 레드썬.
이 외에도 좋았던 포항의 장소들이 있었는데 정리해서 다시 적어봐야겠다. 포항여행은 뚜벅이보다는 자차 혹은 렌트카 이용을 추천한다. 버스 배차간격이 심한 건 40분에 한 대였다. 기다림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