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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Jun 26. 2023

4인용 식탁의 마법

마법에서 풀릴 시간


우리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한다. 손이 크고 뚝딱 뚝딱 빠르게 잘 만들어내서 옆에서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나에게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늘 일 순위로는 집 밥이라고 대답했다. 엄마 표 김치찌개는 내 인생 음식의 부동의 원픽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집 식탁의 요리사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였다.


아빠는 싱겁게를 정말 강조했다. 조금이라도 짜면 인상을 팍 쓰면서 엄마를 타박했다. 엄마는 한 입 맛보며 ‘안 짠데...’를 중얼거렸다. 물론 메인 쉐프에게 엄마의 기준이 먹힐리 없었다.


아빠는 푹 익은 보쌈이 아니면 화를 냈다. 요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냐며 고기를 몇 분 더 익혀야 하는지에 대한 일장연설을 펼쳤다.


아빠는 면을 싫어했고 엄마는 참 좋아했다. 가끔 엄마가 라면을 끓여서 식탁을 차리면 아빠는 밥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한낱 라면으로 가장을 무시한다고까지 생각했다. 결국 남편 대접 안하는 못된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엄마는 밥을 지어야만 했다.


또 아빠는 식탁의 마법사였다. 아빠의 ’물‘ 한마디에 물이 쨘 하고 나타났고 식탁에 앉으면 밥이 생겼고 몸을 일으키면 밥상은 절로 치워졌으며 이윽고 맛있는 간식이 뿅 생겼다. 이렇듯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으면서 밥상 앞에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게 아빠의 마법이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마법 주문이 있었다. ‘성적, 진로, 부모에 대한 예의, 아빠의 고생에 대한 것’들로 이루어진 마법 주문이 시작되면 4인용 식탁 위의 젓가락들은 동시에 무거워졌다.


이 마법은 너무 강력해서 입이 막히고 속도 턱 막히게 해서 들을 때마다 속이 늘 더부룩했다. 소화기관의 혈 자리를 꾹 꾹 누르며 애써 식탁 앞 고정 자리를 지키며 얼른 아빠가 마법 주문 외우기를 끝내기만을 바랐다.


그런 날, 밥 맛은 참 괴기스러웠다. 밥 알갱이 하나 하나가 고무 같았으며 시금치에서는 유독 식초맛이 두드러졌고 가장 좋아하는 엄마표 김치찌개에서는 고춧가루만 입 안에서 따로 놀았다. 그래도 아빠의 마법 주문에 감정이 홀리지 않도록 집중할 무언가가 필요했기에 모든 음식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 우물 거렸다.


학창시절 내내 다양한 마법이 펼쳐지는 식탁에서 자란 나는 스무살이 되고 4인용 식탁에서 벗어났다.


집 밥을 떠난 나에게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늘 고민거리였는데 그보다 더 고민인 것은 누군가와 밥 먹는 자리를 갖는 것이었다.


타인과 함께 잘 차려진 밥을 먹을 때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안면 근육이 뻣뻣해지면서 과한 자의식에 사로 잡혔다. 식사를 하며 오고가는 대화도 너무 곤욕이었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나면 늘 혈자리를 꾹꾹 눌러주어야 했다.


당시에는 혼밥이 어색한 문화였지만 누군가와 식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혼자 먹는 게 훨씬 나을 정도였다.


그마저 어려우면 애초에 약속을 밥 먹기에는 애매하고 커피 한 잔 하기에는 적당한 오후 두시로 잡았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기 전인 5시 정도에 약속을 마무리 하곤 했다.


그러나 ‘밥 한 번 먹자.’가 인삿말일 정도로 밥을 중요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언제까지고 식사 자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맛있는 건 2인분 이상일 때가 많았고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고 싶은 날엔 동행할 누군가가 필요 했다.


결국 식욕 왕성할 때인 20대의 나는 조금씩 노력했다. 상대방을 과하게 의식 하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맛에만 집중하며 열심히 먹었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을 먹어야지.’ 하고 행위의 당위성을 부여해주며 음식에 집중 했다. 그렇게 식사자리를 피하지 않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는 ‘복스럽게 먹는다.’라는 칭찬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집 식탁의 마법사도 바뀌기 시작했다. 차려주는 사람이 없어도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스스로 밥을 먹기도 했으며 가끔은 본인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는 놀라운 행동까지 했다. 간혹 부모님 집에 내려가게 되면 마늘을 까거나 티비를 보며 나물을 다듬는 아빠의 뒷모습까지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아빠가 무슨 연유로 변했는지 모르겠으나 아빠의 마법은 오직 4인용 식탁에서만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엄마나 자식들이 자리를 비운 1인용 식탁의 불가피함을 받아들인 것일수도 있다.


이렇게 4인용 식탁의 마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직까지도 종종 4인용 식탁에 매여있는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다. 이 아이의 억울함과 슬픔을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아서 여태껏 아이 혼자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는 억눌린 감정을 어찌할 바를 몰라서 끊임없이 음식들을 먹기만 하고 있었다.


이 아이의 존재를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부모님 덕분이었다.


어느 날, 부모님이 말했다. 엄마도 아빠도 세월을 따라 몸과 마음이 약해져있는 상태였다.


아빠는 말했다.


‘지나와 생각해보니 아빠가 너희한테 너무 잘 못 했던 것 같다. 너희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갑자기 받아 들게 된 이 말을 어떻게 수용해야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깊은 대화가 오고 갈 타이밍이 아니었다.


아빠는 아빠의 부족함을 스스로 용서해버린 것 같았다. 나의 동의는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또 다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못을 깨우친 자 앞에서 소인배처럼 계속 과거를 들춰낼 순 없었다.


‘언제까지 과거에 매여 있을거야. 아빠도 이제 많이 바뀌셨잖아.‘


엄마는 말했다. 나는 엄마한테 속마음을 드러낸 것을 무척이나 후회했다.


이후로 여기 저기 아프다고 하는 부모님과 최소한의 연락을 유지하던 중에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있는 어린 아이를 발견했다. 가족들 아무도 없는 그 곳에 그 아이는 여태 있었다.


수용된 적 없는 감정을 진정 시키기 위해 뭐라도 씹어대고 있는 아이 옆에 커버린 내가 조용히 앉았다.


더 이상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한 때는 원망했고 이후에는 그들을 이해해버렸고 지금은 나와 분리시켰다.


이제부터 이 아이의 정서적 부모는 나였다. 나는 이 아이에게 사랑과 믿음을 맛 보게 해줄 의무가 있었다. 아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최근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속초의 감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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