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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el Feb 12. 2020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마누엘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를 읽고,

'거미 여인의 키스'를 단편소설집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좀 들여다보면 실험적 구성, 그중에서도 다양하게 시도된 액자 형식이 눈에 띌 것이다. 발렌틴과 몰리나, 두 사람의 대화 속 영화 이야기 전달이 기본이되, 각주와 희곡, 독백과 보고서의 형태로, 이탤릭체 별개 내용이 불쑥 끼어드는 식이다.


액자 형식 속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세계가 새로 만들어진다. 이때 화자는 전달자나 관찰자만이 아닌, 세계의 창조자이자 의미의 생산자가 된다. 독자 의식이 가상 세계 밖으로 나올 때엔, 내면에 일어났던 파문이 각자 삶에 영향을 미친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이 과정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말하자면 메타 문학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다.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도 끝이 있게 마련이다. 두 사람에겐 암울한 현실, 감방으로 돌아감을 뜻했다. 우리는 삶이 괴로울 때 '이게 다 꿈이었으면!'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일종의 현실도피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괴로운 옥살이를 이렇게라도 극복하고 싶었겠다. 이야기를 즐기는 우리들 모습도 함께 담겨 있다.


어떻게 해서 몰리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반복해서 나타나지만,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예를 들어 복통으로 고생할 때) 발렌틴은 몰리나의 이야기를 원했다. 듣고서는 위안과 안정을 느꼈으며 의외의 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남을 잘 보살피는 사람, 몰리나는 이야기로 마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소수자로서 억눌리고 상처 받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는다. 화자도 청자도 필요와 욕구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야기의 지극히 실용적인 효용이라 할까.


이야기는 종종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다. 물리 법칙, 사회 인습, 정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으로 우리 영혼이 보내지게 된다. 굳이 '영혼'이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단어를 쓰는 이유는 현실의 대척점에 있는 정체성의 요소가, 허구일지언정 매우 유용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정말로' 이동하는 것이다. 병렬적으로 진행되는 또 다른 세계에서 우리의 영혼은 다양한 경험을 한다. 지혜를 흡수하며 성장하고, 또 강해진다.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의 어느 졸업식 연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잘하든 못하든 예술을 하면 영혼이 성장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세요.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세요. 이야기를 하세요.''


성장한 영혼, 강해진 정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나의 관심은 인간의 존엄, 개인의 가치에 관해서였다. 묘사된 70년대 남미의 정치 상황은 끔찍했다. 의심받는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정보기관에 의해 감시되며, 정치범의 자백을 끌어내려 비열한 술책이 동원되고 있었다. 이 부당함을 견뎌낼 힘은 무엇인가. 이야기는 우리를 어떤 식으로 강하게 만드는가.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이야기는 편협한 자아의 틀에 사고가 갇히지 않도록 한다고. 자아의 비편재성은 속박되지 않는 정신의 자유로움, 외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인격의 강인함을 선물한다고. 이야기를 접한 내면에는 유연하고 여유로운 사고의 힘, 고난을 감당할 정신의 근력이 생겨난다. 불행을 자기 식대로 소화하도록 마음의 크기가 커진다.


애초에 두 사람은 많이 달랐다. 삶이 투쟁이라 믿는 이상주의자 발렌틴, 늘 애정에 목말라하는 타협주의자 몰리나. 나치 선전영화를 비난하는 발렌틴, 교도소장의 끄나풀 노릇을 하며 음식을 얻어오는 몰리나. 두 사람에게 이야기 나누기는  영혼의 교류 작업이었다. 둘은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며 각자의 일부를 교환했다. 그 결과 서로 닮아갔다. 유약했던 몰리나는 발렌틴의 격려에 용기를 얻고, 반정부 투쟁에 힘을 보태기로 한다. 발렌틴은 고문으로 피폐해진 육신의 고통을 이야기 속 안락함으로 이겨내기에 이른다. 상대방이 내세웠던 가치와 철학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두 사람은, 유연해지는 쪽으로 변했다. 이 변화를 그들의 정신이 어떤 형태로든 성장하고 강해진 증거로 보고 싶다.


유의할 점이 있다. 그들 내면이 성장했다 하여 소설의 결말이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일 필요는 없단 사실이다. 현실은 복잡해간단히 이해되지 않을지 모른다.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하나같이 비극으로 끝나고, 소설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까 어렴풋이 암시하기도 다. 실제로 몰리나는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발렌틴도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하지만 슬픔과 나쁨은 다른 말이란 걸 기억하자. 이 시점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과연 '새드엔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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