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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Dec 17. 2017

<인간실격>과 자아에 대해

진(眞) 자아와 관계의 자아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세 가지 자아가 있다. 첫 번째 자아는 꾸밈없는 자신의 내면이자 진짜의 자아. 두 번째 자아는 타인에게 비치는 자아. 세 번째 자아는 타인이 내게서 기대하는 역할의 자아. 첫 번째는 진(眞) 자아, 나머지는 관계의 자아다. 관계의 자아가 허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 사회 복잡한 관계의 망에서 파생된 이미지일 뿐. 진(眞) 자아는 굉장히 개별적이고 특수한 반면, 관계의 자아는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성향을 띤다.


예를 들어 40대 중년 남성 A의 내면은 타인과 확연히 다른 고유의 색깔이 있지만, A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비치는 모습이나, 그가 수행할 것으로 마땅히 기대되는 역할은 대개 일반적인 특질을 가진다. 가령, A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생활하면서 행동하는 관계의 자아는 비슷한 사회적 지위인 또래 남성의 그것과 유사한 모습을 띌 확률이 높다. 즉, 관계의 자아에서는 뚜렷한 상이성을 찾아보기 어렵고, 단지 타인에게 노출되는 몇 가지 특질에 근거해 "A는 알파형의 사람"과 같이 알파 성향 관계의 자아를 가진 수많은 타인과 같은 군으로 분류될 뿐이다. 마치 고작 4가지 혈액형으로 75억 인류의 성격을 유형별로 나누듯.   


하지만 "그 사람 어때?"라는 물음에 착해, 성격 좋아, 재밌어, 괴팍해, 거만해 등의 몇 가지 단어로 한 사람의 우주를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그 사람의 일부를 접할 뿐이고, 이는 대부분 관계의 자아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알지 못하며, 이는 가까운 친구, 연인,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인간은 외롭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는 어떤 시의 구절처럼. 


사회화는 곧 만인에 대한 만인의 평가다.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을 평가하고 타인에게 평가당하면서, 우리는 관계를 학습하고 어른이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진(眞) 자아를 숨기고 관계의 자아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사회성 있는 사람은 이 과정을 능숙하게 다루는 이를 지칭하고, 사회는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반면 개성 있게 진(眞) 자아를 드러내거나, 관계의 자아를 능숙하게 조절하지 못하는 이는 사회성 없고 적응력 떨어지는 사람 혹은 별종, 괴짜로 치부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학습에 의해 진(眞) 자아를 억누르고 관계의 자아의 탈을 쓴 채, 마치 배우처럼 연기를 하며 삶을 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에 나온 다음 대사는 참 의미심장하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입니다. 그들은 등장하고 퇴장합니다. 어떤 이는 일생 동안 7막에 걸쳐 여러 역을 연기한답니다. 
- 셰익스피어, <뜻대로 하세요> 中-


한편, "재미"는 사회성을 신장하는 강력한 무기다. 재밌는 사람 주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모인다. 가령,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모임이나 회식, 고객과의 미팅, 소개팅 등의 만남에서, 일반적으로 인기가 좋은 사람은 재밌는 사람이다. 재미는 타인이라는 낯설고 어색한 존재와 연결되는 수단이다. 따라서 원활한 사회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는, 때때로 웃음을 파는 광대가 될 것을 요구받는다. 웃기거나 혹은 웃으며 리액션하거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이런 인간사회의 모습을 꿰뚫었다. 그의 소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관계에 서투른 내성적이고, 아이답지 않은 성숙함과 특유의 어두움이 있는 아이다. 자신의 음울한 진(眞) 자아를 감추려, 그는 익살을 통해 사회성 좋은 사람인 양 관계의 자아를 포장한다. 요조에게 타인은 재미를 선사해야 하는 고객이자 언제나 눈치를 봐야 하는 불편한 존재다. 지나치게 순수한 요조는 어른들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관계에 상처받는다. 결국 요조는 술과 마약에 절어 인간 실격자가 된 채 폐인처럼 산다. 참고로 <인간실격>은 자전적 이야기인데, 요조는 결국 작가 다자이 오사무 본인이다. 그는 다섯 번째 자살 기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남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느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 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 땀나는 서비스였습니다......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느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선 안돼. 나는 무(無) 야. 바람이야.   
-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中-  
다자이 오사무의 눈이 참 쓸쓸하다

다자이 오사무가 익살을 떨며 관계의 자아를 포장하기보다, 담담히 진(眞) 자아를 드러냈다면 어땠을까. 그의 그런 모습을 이해해주는 친구나 가족, 연인이 곁에 있었다면 어떗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지 않았을까? 그는 살아생전 지나치게 순수하고 사회성이 없어 지독히 외로운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가 하늘나라에서만큼은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실격이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관계의 자아에 지나치게 신경 쓰면 결국 본인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과, 솔직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설사 그것이 쿨하지 않은 모습이더라도, 누군가에게 미움받거나 거절당할지라도,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당당히 진(眞) 자아를 드러내는 일. 온갖 가식과 허영, 광대의 웃음이 넘치는 가벼운 관계 속에서 이런 솔직함이 빛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백아와 종자기처럼 언젠가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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