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나의 적이 됐는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에는 다음의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온다.
참으로 중요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자살은 당사자에게는 비극, 남겨진 주변 사람에게는 상처, 타인에게는 뉴스다. 우리는 타인의 자살을 접할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금세 잊어버린다. 연예인의 자살, 독거노인의 자살, 예술인의 자살, 삶을 비관한 가장의 자살, 시험에 낙방한 장수생의 자살, 연인에게 버림받은 현대판 베르테르의 자살 등 참으로 수많은 타인의 자살 뉴스가 이제는 놀랍지 않다. 평범한 개인의 자살은 더이상 군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심지어 유명인의 자살에 대한 관심의 유효기간마저 점차 짧아지고 있는 듯하다.
내가 처음으로 자살과 관련한 뉴스가 아닌, 상처를 경험한 것은 약 10년 전이다. 당시 학교 선배 H는 활달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와 두터운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학교에서 오며 가며 인사하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과대표 선배의 단체 문자로 그의 죽음을 접했고, 장례식에 도착해서야 그가 스스로 삶의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고인과 대단히 친한 관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머리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밝은 빛일 뿐, 그늘진 그림자를 보지 못했구나.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사람이었는데.
최근에 유명인들의 연이은 자살 뉴스를 접하고 이에 대한 생각이 많다. 우리는 과거와 비교하면, 맹수, 천재지변, 전쟁, 역병, 범죄, 굶주림의 위협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 더 이상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외부 요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생을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가장 경계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본인이다. "나는 나의 가장 큰 적이다." 특히 한국은, 높은 자살률로 악명 높은데 하루에 평균 36명 꼴로 자살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1980년대와 비교하면,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10만 명의 한국인 중 약 30명은, 가슴속에 총을 숨기고 다니는 셈이다. 총구를 스스로에게 겨눈 채.
나는 어떻게 나의 적이 됐는가?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때,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 종교적, 윤리적 문제를 무시하면, 삶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클 때, 자살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삶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느꼈을 때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든다. 매년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절대적인 삶의 수준이 나아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자살을 할까? 무엇이 자살자로 하여금, 삶을 끝장낼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가?
이와 관련,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의 설명은 일리가 있다. 현대사회는 규율의 사회에서 성과주의 사회로의 이행인데, 이는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의미한다. 즉, 과거는 금지되고 불가능한 것들에 관한, 규율이 지배하는 부정의 사회였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넘치는 긍정의 과잉 사회다. 누구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 신분제는 폐지됐고, "이론적으로" 참신한 아이디어와 실행력, 운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시대 (20세기 말에 방영된,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담은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자수성가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긍정의 과잉과 성과주의가 만연한 피로사회 속, 현대인은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며 통렬히 비판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FDTFPqav3c
예를 들어, A가 18세기 조선시대의 농부의 자식이었다고 상상해보자. A는 장원급제해서, 입신양명하지 못하는 상황을 아마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농부의 자식은 당연히 농부의 자식으로 사는 것이 숙명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신분제라는 구조적인 한계 속, A의 야망은 거세되고, 탓할 대상은 본인이 아닌 사회다. 게다가, 그 당시 '엄친아'와 A의 격차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비교의 대상은 동일한 신분인 옆 집 농부의 자식이고, 비교의 범위도 고작해야 한 마을의 수십명, 수백명 내외다.
반면, 21세기는 상황이 다르다. A는 신분과 상관없이 특출난 성과를 낼 수 있고, 이에 상응하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다. 미디어에서 자신의 성공담에 대해 말하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보라. 가난을 딛고 성공한 기업가, 궂은일을 하다 오디션을 통해 스타가 된 가수, 장애를 극복한 운동선수 등등.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당신의 성취를 가로막을 사회적 제약은 더 이상 없다. 할 수 있다는 긍정의 과잉만 있을 뿐.
한편, 만약 현대인이 마땅한 성취를 하지 못하면, 사회는 그것을 순전히 당신의 노력 및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여긴다. 제한된 자리를 가지고, 경쟁에서 밀린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마에는 '루저'라는 딱지가 붙는다. 게다가 행복을 박제하는 SNS 속 수많은 엄친아들은 당신의 열등감을 부추긴다. 비교의 대상은 더 이상 옆집 농부의 자식이 아니다. 전국, 전 세계의 수 천만, 수 십억의 인류다. 이런 환경에서 스스로 루저라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면, 우울이 스멀스멀 자라고, 자신을 더욱 깊은 심연에 빠뜨린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고 우울한 감정이 증폭될 경우, A는 A의 최대 적으로서 생을 마감할 충동을 느낀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우울증'은, 분명 현대인의 자살을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사회적 원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가? 망자의 죽음을 한 문장의 원인으로 짦막하게 정의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 그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진짜 이유는 그들만 알 테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다만, 내가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는 것은 자살하기 직전 이들은 몹시나 외로웠으리라. 무관심은 가장 확실한 살인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끊기 전,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 유서를 쓰고, 가스를 켜고, 고층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고, 목을 맬 고리를 만들고, 약통을 찾고, 맨들맨들한 손목을 바라볼 때, 어쩌면 이들은 타인의 관심을 절실히 바라지 않았을까.
만약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가운 무관심이나 '잘될거야' 라는 어설픈 위로보다 이런 말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고생했다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이것이 한 개인의 비극과 주변인의 상처를,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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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자살에 대해 관심이 생겼는데 (본인이 죽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주제로서), 언젠가 이와 관련한 책을 쓰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시지프 신화> 이외에 자살에 관한 영감을 주는 책, 영화, 논문 등에 대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