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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Feb 24. 2018

알고 보면 잔인한 영화 <러브레터>

그럼에도 오갱끼데스까를 외치는 비극

*이 글은 영화 <러브레터>의 스포일러가 포함돼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겨울눈을 만끽하고 싶어서 북해도로 여행을 왔더니, 마침 영화 <러브레터>의 배경이 이 곳이라길래, 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봤다. 아주 어릴 적 영화를 보긴 했었는데, 내가 기억하는 장면이라곤, 여주인공이 애절하게 오갱끼데스까 (잘 지내나요)를 외치는 장면뿐이었다. 아마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이 대사만큼은 친숙할 것으로 짐작한다.

오갱끼데스까 (잘 지내나요)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히로코 (여자 주인공 1)는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전 남자 친구 *이츠키 (남자 주인공,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동명인 관계로, 혼란을 막기 위해 앞에 *를 붙였다)를 잊지 못한다. 그러다 *이츠키의 중학교 앨범에서 예전 주소를 발견하게 되고, 히로코는 *이츠키를 그리는 마음에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편지를 받은 사람은 죽은 *이츠키와 동명이인이자 중학교 동창인 이츠키 (여자 주인공 2) 었고, 그녀가 답장을 보내면서 히로코는 혼란에 빠진다. 


결국, 히로코는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꺠닫지만, 이츠키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끼며, 그녀와의 편지를 이어나간다. 히로코는 *이츠키의 어린 시절을 궁금해하며, 그의 과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츠키는 히로코 덕분에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고, 중학생 시절 자신과 *이츠키가 이름이 같아서 생겼던 일화 등 소소한 학창 시절의 추억을 히로코와 공유한다. 


한편, 주목할 것은 히로코와 이츠키의 외모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점이다. 히로코는 이츠키가 전하는 추억의 꾸러미에서, 어쩌면 *이츠키의 첫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일지 모른다는 직감을 한다. 이츠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를 부정하지만, 영화 마지막에 *이츠키의 수줍은 러브레터를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그가 자신을 좋아했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편지로 기록하지만, 히로코에게는 차마 부치지 못한 채 영화는 끝난다.

*이츠키가 보낸 러브레터

아- <러브레터>는 시나리오의 참신함이나, 영상미, 음악, 배우들의 연기에 정말 만점을 주고 싶은 영화다. 그런데, 영화를 곱씹어보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츠키는 히로코를 사랑한 것일까 아니면 첫사랑의 분신을 사랑한 것일까. 이츠키에게 히로코는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그들의 관계는 반드시 였을까, 아마도였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는데, 히로코가 독백을 하는 부분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저 *이츠키에게 포로포즈 받지 못했어요. 어느 날 마야산 전망대로 불러내고 손에 반지 케이스까지 준비하더니, 아무 말도 없는 거예요. 둘이서 두 시간 정도 말없이 야경만 바라봤죠. 그러다 보니 안쓰러운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제가 먼저 말했죠. "나랑 결혼해주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 "그래"라고 한마디 하더라고요.   - 히로코의 독백 - 


말없이 야경을 바라보며, *이츠키는 얼마나 머리가 복잡했을까. 사랑하는 것이 그대인지 그때인지.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중, 정적을 깬 히로코의 급작스런 청혼에 *이츠키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다. 그러곤 그동안 쌓은 정과 당시의 분위기에 못 이겨, 체념한 듯 그녀의 청혼을 승낙한 것이 아닐까. 아무리 표현에 서툰 남자라도, 사랑하는 여자가 청혼하는 상황에서, "그래"라고 짥막하게 답하고 마는 경우를 나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히로코는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던 *이츠키의 구애가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리고 슬픔에 빠진다. 자신의 존재와 그와 쌓은 추억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하고 산에 올라 외친다. 오갱끼데스까- 이 얼마나 비극인가! 가련한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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