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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Feb 17. 2018

<시지프 신화> -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는 레옹에게 묻는다. "사는 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아니면 어릴 때만 이래요?" 여기에 레옹은 답한다. "언제나 힘들지"

영화 <레옹> 中

실로 그렇다. 사는 것은 원래 힘들다. 근심 없고 행복만 가득한 완벽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달팽이처럼, 크고 작은 자신만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유한한 인간의 삶을 고려하면, 인생이 고난의 연속이라는 것은 참으로 허무하다. 육중한 짐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어떤 달팽이에게는, 삶은 어쩌면 지독한 형벌일 수 있다.

시지프 형벌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이것은 본인의 선택도, 신의 축복도 아니다. 한 인간의 탄생은,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만들어진 수정란이,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하여 나온 유전적 결과물일 뿐이다. 태어남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다. 인간은 의도치 않게 고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다. 아이가 태어난 직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주 무미건조하게 묘사하자면, 인간의 삶은 단두대로 가는 행군이다. 종점에는 어김없이 시퍼런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고, 누구도 이것을 피할 수 없다.  탄생과 동시에 죽음의 시계는 작동한다. 틱톡 틱톡 시곗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죽음으로의 초대는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놀랍도록,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둔감한 듯하다. 


한편, 탄생은 본인의 재량이 아니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자살자는 죽을 권리를 실현한, 죽음의 주권을 양도하지 않은 자다. 살아 있음으로 얻는 슬픔이 기쁨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면, 스스로 죽음의 시계를 앞당기는 것은 경제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인생을 살 가치가 없다면, 자신의 어깨 위 짐이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면, 살아서 무엇하랴? 누구도 자살자의 비겁함에 대해 욕할 권리가 없다. 자살자의 마음속 깊숙이 박혀있던 가시는,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이 없다. 망자는 말이 없다. 


마광수 - 자살자를 위하여


카뮈는 묻는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다소 도발적인 그의 질문은, 청중으로 하여금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이 인간을 고난으로 점철된, 단두대라는 엔딩이 정해진, 삶의 서사를 지속하도록 만드는 걸까. 답을 얻으려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갈등에서, 부조리가 생긴다. 부조리와 허무, 무기력한 권태 속 자살을 택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최악의 방법이고, 막연한 희망도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부조리에 대해 카뮈가 제시하는 답은 "반항"이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고,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반항하는 자는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다. 이들은 표준화된 공산품을 거부하는 불량품이다. 길들임에 반대하는 날 것이다. 지도 밖 세계로 행군하는 탐험가다. 


힘겹게 인생의 짐을 지고 가는 모든 이들이여, 반항하라! 참지 말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라. 그대들의 삶은 단두대로 향하는 권태로운 행군에서, 생기 넘치는 소풍으로 바뀔 것이니.


https://www.youtube.com/watch?v=By4ihDN3-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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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무대 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이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의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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