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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r 26. 2018

<소비의 사회> - 지름신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를 읽고

충동적으로 소비한 후에, 다음 달 카드값 걱정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주머니 가볍던 대학생 시절, 유명 브랜드 옷을 몹시 사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옷의 가슴팍에 붙은 빛나는 브랜드 로고와, 그 옷을 입은 포스터 속 유명 배우는, 내게 옷을 사면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라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목덜미에 달려있던 가격표 속 무뚝뚝하게 박혀있던 검정 숫자들은, 분명 학생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수준이었고, "네가 날 산다고? 돈 없는 애들은 가라."라며 위용을 드러냈다. 오기였을까. 나는 충동적으로 옷을 사버렸고, 지출을 줄이기 위해 이 주일간 약속을 잡지 않고 집과 학교만을 오갔던 기억이 있다.        


지름신은 '지르다'와 '신'의 합성어로, 충동구매를 부추기는 심리다. 누구나 정도가 다를 뿐, 두뇌 속 지름신에게 조종당할 위험에 매일 노출돼있다. 뇌 과학 연구에 따르면, 지름신은 '대뇌측좌핵'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이 상품을 접할 때, 쾌락을 관장하는 대뇌측좌핵이 활성화되고 구매욕을 느낀다. 광고업계는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두뇌 속에 잠들어 있는 지름신을 집요하게 자극한다.

지름신은 파괴의 신 쉬바다. 지름신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사물은 해체되고 파괴되어야 한다.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지고, 기존의 것이 다소 후진적인 양식 - 구식, 촌스러움 따위 -으로 전락할 때, 지름신은 강림한다. 또한, '허영'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지름신이 불멸할 토대를 제공한다. 사치품은 반드시 필수재가 되고,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소비할 명분을 만들어왔다. 따라서 지름신은 영구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점은, '지름신에게 덜 휘둘리는 법'을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는 해법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에 따르면 사물에는 네 가지 가치가 있는데, 바로 교환가치, 사용가치, 상징적 교환가치 그리고 기호 가치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호 가치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용가치에 근거해 소비하지 않는다. 타인과 자신을 구별 짓기 위해 사물을 항상 조작하고 코드화 된 기호를 소비한다. 소비는 집단적이고 강제적인 사회 작용이다.


특히, 사치재 가치의 대부분은 브랜드 로고에서 비롯된다. 대척점으로 여겨지는 재화들 - 가령,  에르메스와 무지 에코백, 로렉스와 지샥, 벤츠와 아반떼와 같은, 상위의 기호와 대중의 기호 - 의 본질적 사용가치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구의 기호를 얻기 위해 기꺼이 높은 금액을 지불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타인에게 자신의 경제력 및 취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숨어있다. 돈을 어떻게 쓰는지는 개인의 재량이겠지만, 습관적으로 과소비를 하는 자들 - 카푸어, 신용카드 돌려 막기 하는 쇼퍼홀릭 등 - 이 주위에 있다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개 낮은 자존감을 바탕으로, 소비를 통해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는 가련한 사람들이다.  


지름신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선, 이러한 기호가 인간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상당한 수준의 돈이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기호를 소비하기 위해 쓰인다는 사실은 참으로 허무하다. 지구별의 어떤 이가 생존을 위해 1달러 값어치의 양식을 필요로 할 때, 다른 이는 상류의 기호를 쟁취하기 위해 수 천, 수 만 달러 이상을 지출한다. 만약 신이 지구별을 창조하고 메가폰을 잡았다면, 그는 지독한 새드 스토리 예찬론자였을 것이다.


작위적으로 생성된 기호의 가치를 관조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소수만이, 건강한 정신으로 지름신을 통제할 수 있는데, 이들은 다음에 공감할 것이다. 기호는 더 많은 소비를 위해 고안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허구의 기호를 바탕으로 서열을 나누는 것은 대단히 무의미한 짓이라는 것. 기호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것. 과소비는 애처롭고 가련하다는 것. 소비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려는 행위는 영혼의 빈약함을 반증하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QvVHUxmJb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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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우리는 사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사물의 리듬에 맞추어서 사물의 끊임없는 연속에 따라 살고 있다.


소비 사회가 존재하려면, 사물이 필요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엄청난 수, 쓸데없는 장식, 없어도 되는 것, 지나친 형태, 유행의 작용,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 모든 성질을 통해 사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적 본질 – 지위 – 을 흉내 낸다. 지위,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지 출생에 의해 주어지는 숙명의 은총이며,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의 운명에 의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코 사물 자체를 (그 사용가치에서) 소비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준거로서 받아들여진 자기집단에 대한 소속을 나타내기 위해서든, 아니면 보다 높은 지위의 집단을 준거로 삼아 자신의 집단과는 구분하기 위해서든 간에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구별 짓는 기호로서 사물을 항상 조작한다. 


직업상의 또는 문화적인 갈망보다 훨씬 더 큰 유연성을 나타내는 순수한 소비 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순수한 소비 갈망은 사실 어떤 계급에게는 사회 이동의 면에서 중대한 실패를 보상하는 것일 수 있다. 소비 충동은 사회계급의 수직적인 서열에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보상하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소비’ 갈망은 지위를 추구하는 요구의 표현인 동시에 이 요구의 실패를 체험한 데서 나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생산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지만 욕구의 증대에는 한계가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의 욕구에는 한계가 없다. 음식물의 섭취량에는 한계가 있으며 소화기관의 활동에도 한계가 있지만, 음식물에 관한 문화체계는 무한하다. 또한 그것은 상대적으로 우연적인 체계다. 


인구밀도가 높은 것 자체는 매혹적이지만, 특히 도시라는 말은 경쟁 그 자체다. 동기, 욕망, 만남, 자극, 다른 사람들의 끊임없는 판정, 계속되는 성욕 자극, 정보, 선전의 유혹, 이 모든 것이 보편화된 경쟁이라는 현실 기반에서 집단적 참가라는 일종의 추상적 운명을 구성한다. 


욕구라는 것은 결코 어느 특정한 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 차이에의 ‘욕구’ (사회적 의미에의 욕망)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완전한 만족이라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욕구에 대한 정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즐기지만, 그러나 소비할 때는 결코 혼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든 소비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연루되는, 코드화 된 가치들의 생산 및 교환의 보편화된 체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소비 인간은 그 어떠한 향유이든, 무언가를 ‘놓치는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접촉이, 어떤 경험이 ‘흥분’을 주지 않는 가에 대해서는 결코 모른다. 문제 되는 것은 더 이상 욕망도 아니며, 특정한 ‘취미’나 성향도 아니다. 그것은 막연한 강박관념에 의해 움직이는 보편적 호기심이며, ‘오락의 모럴리티’이다. 그곳에서는 즐기는 것, 자신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하거나 만족시키는 모든 기능성을 철저하게 개발하는 것이 강요된다.


소비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불확정적인 주변 영역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이며, 강제이고, 도덕이며 제도이다. 소비라는 것은 하나의 가치체계이며, 체계라는 용어가 집단 통합 및 사회통제의 기능으로서 포함하는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리하여 여가에서의 자유라고 하는 허구에도 불구하고 논리적으로 ‘자유’ 시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구속된 시간뿐이다. 소비시간은 생산 사이클에서의 ‘기분풀이적인’ 괄호에 불과한 한에서 생산시간이다. 그렇지만 생산시간을 보충하는 이러한 기능은 소비시간의 본질적 성격이 아니다. 여가는 표면적으로는 공짜인 것처럼 보이지만, 생산시간과 노예화된 일상성에 따라다니는 모든 정신적, 실천적 구속을 충실하게 재현한다는 의미에서 구속된 시간이다.


오늘날에는 순수하고 단순하게 소비되는 것, 즉 일정한 목적만을 위해서 구입되고 소유되며 또 이용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당신 주위에 있는 사물은 무엇인가에 쓸모가 있다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우선 당신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개성화된 ‘당신’이라는 이 직접적인 대상이 없으면, 그리고 개인 수당이라는 포괄적 이데올로기가 없으면 소비는 무자 그대로 소비에 불과할 것이다. 소비에 현재와 같은 깊은 의미를 주는 것은 팁과 그것에 의미를 두는 개인적 위안의 따뜻함이지 순수하고 단순한 충족이 아니다. 현대의 소비자들은 이 배려의 양지에서 피부를 태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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