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신은 죽었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유명한 니체는, 목사의 아들로서 원래 신학을 공부했었다. 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화되어, 신앙을 포기하고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니체는 사회를 지배하던 전통적 가치가 붕괴되고 사람들이 허무주의에 빠질 것임을 예언했다. 종교의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암흑의 중세시대를 거쳐,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종교의 절대적 권위에 균열이 생기던 때였다.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통치에 유용한 도구로 쓰였으며, 나약하고 평범한 인간들의 삶을 지탱해주던 거대한 관념의 덩어리 '신'은, 그 존재의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한 이후,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그의 말대로 신은 죽었다. 아니, 쇠약해졌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 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신을 믿고, 종교집단이 만들어낸 허구의 규칙들을 따르며, 편을 가르고 때때로 테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니체는 침통해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의 권위 (혹은 종교단체) 및 종교가 현대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과거만큼 영향력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과 의학은, 날카로운 메스로 종교의 장막을 걷어내며 신의 치부를 드러내려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은 니체가 말한 대로 초인 (위버멘시) 이 되었는가? 우상숭배를 종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가? 안타깝게도 다수의 인간들은 평생 지배받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듯하다. 신의 왕좌를 차지한 것은 돈이고, 돈은 신마저 실패한 대통합을 이뤄냈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온갖 소수 종교인들 모두 물신숭배라는 교리를 떠받든다. 돈은 삶의 목적으로서 기능하며 이미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다양한 무대장치를 통해, 돈의 신도이자 수단으로 전락당할 위험에 너무나도 빈번히 노출된다.
또한 '죽도록 즐기는 유희' 또한, 신의 노쇠에 따른 공허함을 효과적으로 메워준 듯하다. 대중은 죽도록 즐긴다. '재미'는 더 이상 오락쇼의 특징이 아니다. 시사, 교양, 교육, 정치, 경제 등 다소 진지한 주제의 정보는 모두 재미로 뒤덮인다. 재미라는 껍데기로 포장된 수많은 정보는 빠르게 휘발된다. 5인치 스마트폰 스크린 위를 부유하는 수많은 정보의 쓰레기는, 통찰과 지혜를 묻어버린다.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사색할 시간은 점점 부족하고, 인간은 자신을 망각하는 줄도 모르면서 죽도록 즐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재미와 거리가 먼 책이다. 이 책을 대학생 때 처음 접했을 때, 난해한 문체로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후 세상을 보는 나름의 관점이 생기고,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을 할 줄 알게 되었을 때, 다시 읽은 이 책은 내게 무한한 전율과 감동을 주었다. 책에 적힌 활자들이 니체를 대신해 내게 호통을 치는 듯했다. "스스로 자신을 극복하고 저 너머로 건너가서 초인이 되라고!" 나를 둘러싸고 있던 관념의 세계가 박살 나는 경험이었다.
한편,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하고, 이 책을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실로 그렇다. 그의 육신은 흙이 됐지만, 정신은 불멸하여 품격 있는 초인들을 키웠고, 그들의 손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창조되었다.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판업자들에게 번번이 거절당하고, 결국 니체는 자비로 책을 출판했다. 책의 부제가 '모두를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인 것은 참 의미심장하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다. 아-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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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발견
인간에게 있어서 원숭이란 무엇인가?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수치. 초인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꼭 그와 같은 존재. 즉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수치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고, 많은 점에 있어서 아직도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인간은 더러운 강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바다가 외어야 한다. 더러워지지 않으면서 더러운 강물을 받아들이려면.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초인은 바다이며, 그대들의 커다란 경멸은 그 속으로 가라앉을 수 있다. 그대들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경멸의 순간이다. 그대들의 행복.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이성과 그대들의 덕이 역겨워지는 순간이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뒤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다시는 군중과 말하지 않으리라. 죽은 자와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창조하는 자, 수확하는 자, 축제를 벌이는 자와 함께 하리라. 그들에게 무지개를, 초인에 이르는 계단들 모두를 보여주리라.
고뇌와 무능함. 이것이 그 모든 세계 너머의 세계를 꾸며냈다. 더없이 괴로워하는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저 짧은 행복의 망상. 그것이 세계 너머의 세계였다.
그대들의 자기는 그 스스로가 가장 원하는 일, 즉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는 것은 자기가 가장 원하는 일이며, 자기의 최고의 열정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순간의 쾌락에 빠져 뻔뻔하게 살았고,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 것 이외에 거의 아무런 목표도 가지지 않았다. “정신도 쾌락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정신의 날개는 찢어지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정신은 여기저기 기어서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갉아대며 몸을 더럽힌다.
삶은 고된 노동이며 불안이라고 생각하는 그대들도 삶에 몹시 지쳐있지 않은가? 그대들도 죽음의 설교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아주 성숙되지 않았는가? 고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그대들. 그대들 모두는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의 부지런함은 도피이자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다.
국가는 가장 냉혹한 괴물들 가운데서 가장 냉혹하다. 그 괴물은 차갑게 거짓말한다. 그 괴물의 입에서는 “나, 즉 국가는 민족이다”라는 거짓말이 기어 나온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족을 창조하고 그 민족으로 하여금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사랑에 매달리게 한 것은 창조하는 자들이었다.
위대한 일은 모두 시장과 명성을 떠난 곳에서 일어난다. 옛날부터 새로운 가치의 창안자들은 시장과 명성을 떠난 곳에서 살아왔다.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그대는 독파리떼에게 마구 쏘이고 있다. 달아나라. 사나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곳으로! 그대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지금까지는 천 개의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천 개의 만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천 개의 목에 채울 족쇄, 즉 ‘하나’의 목표가 없을 뿐이다. 인류는 아직도 목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말하라. 형제들이여. 인류에게 아직도 목표가 없다면, 그것은 인류 그 자체도 아직 없음을 뜻하지 않는가?
그대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인가? 그대는 또한 별들을 강요하여 그대 주위로 돌게 할 수 있는가?
그대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그대가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지배하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대는 굴레로부터 벗어나도 좋은 그런 자인가?
그러나 고독은 언젠가 그대를 지치게 할 것이며, 그대의 긍지는 언젠가 구부러지고 그대의 용기는 으스러질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외치게 되리라. “나는 외롭다!”라고.
그들은 고독한 자를 향하여 부당한 심판과 오물을 던진다. 그러나 형제여, 그대가 하나의 별이 되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여전히 비춰주어야 한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창조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그대의 일곱 악마로부터 하나의 신을 창조하려고 한다! 고독한 자여. 그대는 사랑하는 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대는 자신을 사랑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경멸한다.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몰랐던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대는 보다 높은 몸을, 최초의 움직임을,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하는 자를 창조해야 한다. 창조한 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 하나를 창조하려는 두 사람의 의지. 이것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지를 실천하려는 상대방에 대한 외경심을 나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대가 말하는 결혼의 의미이고 진리이기를. 그러나 많고 많은 어중이떠중이들. 이 인간쓰레기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나는 이것을 무어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궁핍함이여!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더러움이여! 아, 짝을 지은 두 영혼의 가련한 안일함이여!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결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은 하늘에서 맺어졌노라고 말한다.
어떤 자는 마음이 먼저 늙고 어떤 자는 정신이 먼저 늙는다. 그리고 또 어떤 자는 젊은 시절에 백발이 된다. 그러나 늦게야 청년이 되는 자의 젊음은 오래간다.
진실로 바라노니, 그대들은 나를 떠나라. 그리고 차라투스트라에 대항하라! 그리고 더 바람직한 것은 차루투스트라라는 존재를 부끄러워하는 일이다! 그가 그대들을 속였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인식하는 인간은 적을 사랑할 뿐 아니라 벗을 미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나 학생으로 머물러 있는 선생에게 제대로 보답하지 못한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나로부터 월계관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가?
그대들이 나를 만났을 때, 그대들은 아직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신도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신앙이란 이처럼 보잘것없는 것이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길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때이며,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새로운 아침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그대 창조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의 삶에는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은 그 모든 무상함의 대변자가 되고 옹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 스스로가 새로 태어날 아이가 되려면, 그 자신이 산부가 되어 그 산고를 겪으려 해야 한다.
이제 나의 망치가 그 형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두들겨 부순다. 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는 이 형상을 완성하려고 한다. 어떤 그림자가 나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만물 가운데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가벼운 것이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초인의 아름다움이 그림자로서 내게 다가왔던 것이다. 아, 형제들이여! 신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군중의 미움을 받는 자는 개들에게 쫓기는 늑대의 신세와도 같다. 그렇게 미움을 받는 것은 그가 자유로운 정신이며, 속박에 맞서는 자이고, 숭배를 모르는 자이며, 숲 속에 거처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노예의 행복에서 해방되고, 신들과 숭배함으로부터 구제되며,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두렵게 하고, 위대하면서도 고독해지는 것. 진실된 자들의 의지는 이와 같은 것이다. 진실된 자들,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자들은 예로부터 사막의 주인으로서 사막에서 살았다. 그러나 도시에는 피둥피둥 살찐 이름난 현자들, 수레를 끄는 가축들이 산다. 다시 말해 그들은 노새로서 끊임없이 끌고 있는 것이다. 군중이라는 짐마차를!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에게 분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비록 황금 마구를 번쩍이고 있다 하더라도 하인에 불과하며, 마구에 묶인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의 얼굴보다 더 나은 가면을 쓸 수는 결코 없으리라. 그대 현대인들이여! 누가 그대들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온몸에 과거의 기호들이 가득 적혀 있으며, 또 이 기호들 위로 새로운 기호들이 덧칠해져 있다. 이와 같이 그대들은 모든 기호 해독자들로부터 자신을 잘도 숨겨놓았다.
나는 허영심 강한 자들이 모두 훌륭한 배우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관객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들의 연기를 보아주기를 바란다. 그들의 모든 정신은 이러한 의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스스로 연출하고 스스로 꾸며낸다. 나는 그들 가까이 있으면서 삶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슬픔을 치료해준다.
나는 신을 부정하는 차라투스트라다. 나는 어디서 나와 대등한 자를 찾을 수 있는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펼치고 그 어떤 순종도 거부하는 자는 모두 나와 대등한 자다.
모든 인간 존재는 보살핌 받고 동정받기를 바란다. 진리를 감추고, 바보의 손을 가지고 바보가 된 마음으로, 그리고 동정에서 나온 사소한 거짓말을 허다하게 하면서 나는 인간들 가운데서 그렇게 살았다. 나는 가면을 쓴 채 그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내가 그들을 참아내고 있다고. 나 자신이 오해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창조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그리고 이 창조하는 자는 인간의 목표를 창조하고 대지에 그 의미와 미래를 부여하는 자다. 이 창조하는 자가 비로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결정한다.
나는 자신을 아끼지 않는 자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렇게 몰락하는 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들이야말로 저 너머로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그대처럼 자라는 자를 나는 소나무에 비교한다. 장구하고 말이 없고 엄격하고 외롭게 서 있는, 더없이 좋고 더없이 유연하면서 당당하기까지 한 소나무.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이것을 배우라. 시장에서는 차원 높은 인간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대들이 거기서 말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 하지만 천민은 눈을 깜빡이며 말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라고. 천민은 이렇게 눈을 깜빡이며 말한다.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차원 높은 인간 같은 것은 없다.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신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신 앞에서라고! 그러나 이제 이 신은 죽었다. 천민 앞에서 우리는 평등해지고 싶지 않다. 그대들, 차원 높은 인간들이여. 시장을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