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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01. 2018

<데미안> - 성장하는 인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문명이 진화했어도, 여전히 많은 점에 있어서 인간은 침팬지다. 우리는 놀라우리만치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강자에게 길들여지기를 원하고, 빵 앞에서 작아지는 침팬지 같은 존재다. 


인간이 침팬지와 자신을 구분 짓고, 성숙한 개체로 거듭나는 것은 중대한 사건이자 극적인 변화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누구나 인격도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나이와 연관 있는 것은 세포의 노화일 뿐, 인격의 성숙도와 나이는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일상에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어른들을 마주치는가.  


한편, 산업화 이후 인간에게 성장은 오로지 경제적 성취 및 생산성 증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었는지,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했는지가, 일반적인 성장의 의미가 돼버렸다. 이는 대단히 기계적인 계산법으로, 특히나 물신숭배가 부상하며 두드러진 현상이다. 현대인들이 성장을 위해 혹독하게 기름칠을 해대는 것을 보면, 인간은 스스로 침팬지에서 로봇으로 변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영혼의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의 성숙은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보통 기존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것에서 시작된다. 가령, 일반적으로 부모와 선생은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아이를 길들인다. 아이는 대개 의심 없이 주입된 것을 받아들이고, 어른들이 마련한 영역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다 문득 의문을 품고 '저 너머의 세계'를 용감히 체험할 때, 기존의 세계는 붕괴되고 이 아이의 성장판은 열리기 시작한다. 


성장은 필시 성장통을 수반하며, 그 과정에서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한다. 기존의 '나'는 죽어 퇴적되고, 그 위에 새로운 내가 탄생하여 얹힌다. 이처럼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만의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즉, 타인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개성이 생기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침팬지와 자신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 


<데미안>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 중 하나이다. 데미안의 진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자 스스로 싱클레어가 되어 인습의 세계를 파괴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조리에 저항하다 생긴 선명한 생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 필독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 십 대들은 - 필자도 그랬고 - 이 책을 온전히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이 입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없도록, 한국 사회가 구조적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학교를 졸업한 성인이 된 후에도, 많은 이들이 편협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이것은 경험의 결핍에서 비롯된 무지이다. 젊을 때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해보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낯선 저 너머의 세계'를 많이 체험할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를 파괴하고, 성장한 경험이 있는가?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보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PuXjuoCnQ&t=9s

<데미안>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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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아이다. 그는 부모의 사랑이 넘치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과 도덕이 둘러싼 밝은 빛의 세계에 살고 있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해 있지 않은, 저 너머의 음침한 어둠의 세계를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무질서와 폭력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가 묘사한 두 세계를 보자.


그곳에서는 두 세계가 뒤섞였다. 밤과 낮이 두 극으로부터 나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그 세계는 협소해서 사실 그 안에는 내 부모님밖에 없었다. 그 세계는 나도 대부분 잘 알고 있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다. 그 세계의 이름은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그 세계에 속하는 것은 온화한 광채, 밝음과 깨끗함이었다. 그곳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이야기들, 꺠끗이 닦은 손, 청결한 옷, 좋은 관습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침에 찬송가가 불려졌다. 그곳에는 성탄절 잔치가 있었다 ... ... 반면 또 하나의 세계가 이미 우리 집 한가운데에서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냄새도 달랐고, 말도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도 달랐다. 그 두 번째 세계 속에는 하녀들과 직공들이 있고 유령 이야기들과 스캔들이 있었다. 무시무시하고, 유혹하는, 무섭고 수수꼐기 같은 물건들, 도살장과 감옥, 술 취한 사람들과 악쓰는 여자들, 새끼 낳는 염소와 쓰러진 말들, 강도의 침입, 살인, 자살 같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로 발을 딛는 사건이 발생한다. 싱클레어는 불량배 친구 크로머에게 허풍을 떨며 거짓말을 하게 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크로머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크로머에 시달리며 싱클레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만, 차마 부모에게 알리지 못한 채 어둠의 세계 속에서 번민한다. 이것은 싱클레어가 겪은 최초의 성장통이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부모에게 거짓을 말한 채,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한편, 데미안이 전학을 오고 싱클레어는 그의 묘한 매력에 호감을 느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농부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같아 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는 변장한 왕자님" 같다고 묘사하며, 그의 신중하고 성숙한 모습에 끌린다. 둘은 서서히 가까워지는데,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어둠의 세계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크로머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낸다. 


이것을 계기로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더욱 친해지고, 데미안 특유의 침착함과 사려 깊음에 싱클레어는 상당한 영감을 받는다. 싱클레어의 눈에 데미안은 성숙하고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는 어른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현상을 비틀어보는 것을 가르쳐주고, 싱클레어가 속해있던 빛의 세계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예를 들어,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을 인용하며, 초인적 인간에게는 카인의 표적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싱클레어가 교육받았던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개안 (開眼) 하고 성장하는 것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한다.


그는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어. 그걸 사람들은 자기 원하는 대로 설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들한테 편하고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원하지.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 하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또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용기와 나름의 개성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한테 늘 몹시 무시무시하거든.


싱클레어는 훈육으로 인해 형성된 기존의 가치관이 도전받을 때마다 혼란을 느낀다. 데미안을 통해 낯선 세계를 접할 때마다, 그는 거부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서서히 비판적 사고를 하는 힘을 키우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며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유년의 세계는 무너지고, 낡은 것이 돼버린다. 결국 싱클레어는 부모의 곁을 떠나고 독립한다. 


한편, 시간이 흘러 싱클레어는 앳된 티를 벗은 청년이 된다. 싱클레어는 더 이상 부모의 보호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아이가 아니다. 그는 술을 마시고 성욕을 느끼며, 향락에 취한 채 방황한다. 자신이 어릴 때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둠의 세계를 마음껏 향유하지만, 싱클레어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던 와중, 그는 데미안을 그리워하고 새 그림을 그려 보낸다. 데미안으로부터 받은 답장에는 다음의 짥막한 글귀가 쓰여있는데, 이는 <데미안>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아프락사스는 신이자 악마인 양면적 존재이다. 유아적 인간은 보통 하나의 신을 가지는데, 이는 절반의 세계일 뿐이다. 이 쪽과 저 쪽의 경계를 정해놓고, 하나의 세계에서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유년기로 족하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통해 낯선 어둠의 세계의 두려움을 극복했듯이, 모름지기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낯과 밤의 세계가 공존함을 인정해야 한다.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대오각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재회하고,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흠모하게 된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성상이다. 그녀는 아프락사스와 같은 존재인데, 성녀인 동시에 관능미 넘치는 이브 같은 매력을 뽐낸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에바 부인과 교류하고, 그녀는 그에게 성숙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  


한편, 전쟁이 발발하고 싱클레어는 참전한다. 그는 전쟁 중 부상을 당하게 되고, 꿈에서 데미안을 만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별을 고하고, 꿈에서 깬 싱클레어는 덩그러니 혼자 남는다. 성숙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채. 싱클레어는 더 이상 데미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데미안처럼 카인의 표적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버린 것이다.


아침에 사람들이 깨웠다. 붕대를 감아야 했던 것이다. 마침내 완전히 잠이 깼을 때, 나는 얼른 옆 매트리스로 몸을 돌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 거기 누워 있었다.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어 완전히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거기 어두운 겨울 속에서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거기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데미안>만큼 성장하는 인간을 섬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있을까.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도움을 받아 초인이 됐고, 그 자신이 인도자가 되어 다른 누군가의 성장을 도와줄 것이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 다른 방식을 통해, 각자의 삶을 산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 가지 공통된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나다운 인생'을 살며 성장하는 것이다. 데미안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로 글을 맺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모호하게 어떤 사람은 보다 투명하게, 누구나 그 나름대로 힘껏 노력한다. 누구든 출생의 전제, 시원의 점액과 알 껍질을 임종까지 지니고 간다. 더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한 채, 개구리에 그치고 말며, 도마뱀에, 개미에 그치고 만다. 그러고 더러는 위는 사람이고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이 되려고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모두 유래가 같다. 어머니들이 같다. 우리 모두는 같은 협곡에서 나온다. 똑같이 심연으로부터 비롯된 시도이며 투척이지만 각자가 자기 나름의 목표를 항하여 노력한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건 누구나 자기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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