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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Jun 05. 2018

<보바리 부인> - 욕망하는 인간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원한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처럼 어떤 욕망이 충족되면 금세 시들어지고 새로운 욕망이 생기는 것을 보면, '인생은 권태와 욕망을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라고 표현한 쇼펜하우어의 말은 일리가 있다. 인간의 숙명이란, 기존의 욕망을 새로운 욕망이 대체하고, 이것을 충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정인 듯하다.


욕망은 많은 철학자들이 고심한 주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한 사람의 마부가 끄는 두 마리의 말로 이루어진 쌍두마차로 비유했다. 그는 두 마리 말을 각각 의지와 욕망으로 비유했고, 이것은 이성이라는 마부에 의해 조종받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스피노자는 욕망을 영혼의 본질로 생각했다. 그는 플라톤의 쌍두마차 비유에서, 욕망을 마부의 위치로 격상시키고, 이성이 욕망의 통제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라고 여겼다.


인상적인 것은, 시대적 배경 및 가치관에 따라 욕망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상이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처럼 금욕주의가 강제되던 때, 욕망은 멀리해야 할 악의 씨앗이었다. 욕망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엄격한 규율 하에 욕망을 애써 무시하고 멀리했다. 이 당시 인간은 신의 종이 었기에, 감히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거나 실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면, 르네상스 및 근대에 접어들어 종교의 절대적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억압됐던 인간의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된다. 특히나 자본주의의 발달로 욕망의 대상은 물질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무색할 정도로, 물질에 대한 소유욕은 바람직한 것이 돼버렸다.


한편,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현대인이 가진 욕망의 특징을 잘 꼬집어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실은 타인의 욕망일 확률이 무척 높다. 가령, 아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망은 대개 부모의 욕망으로, 이때 욕망의 본질은 공부가 아닌 부모로부터 받는 인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졸업 후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자신 내면의 욕망보다는 부모의 욕망대로 행하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한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특성은 특히 소비에서 두드러진다. 사람들이 소비를 하는 동기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라기보단, 타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일 확률이 높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것은, 재화가 아닌 기호라고 분석하며 이 점을 간파했다. 즉, 사람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상위의 기호들 - 넓고 고급스러운 아파트, 외제차, 명품백, 5성급 호텔에서 보내는 해외 휴가 등 - 은 사실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욕망하도록 학습'된 것일 뿐, 주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광고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을 부추기며, 왜곡된 욕망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재생산해낸다.


적정한 수준의 욕망은 결핍을 해소하고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지만, 과도한 수준의 욕망은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암세포가 된다. 특히나 욕망의 근원이 자신이 아닌 타자에서 비롯된 것일 경우, 이것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이러한 욕망은 괴물처럼 탐욕스럽게 입을 벌린 채, 늘 새로운 먹이를 갈망하기 때문에 건강한 욕망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성숙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고, 이것을 적절히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무엇을 원하기를 원하도록' 길들여진다.


<보바리 부인>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파멸한 인간의 이야기로,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비롯된 '보바리즘'은 감정적, 사회적으로 불만족스러워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 질환을 뜻한다. 언제나 과거를 향수하고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재의 기쁨을 느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어릴 때 얕팍한 통속 소설 대신 다음의 톨스토이 생각을 읽고 사유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다. 현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잇는 무한한 작은 한 점일 뿐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하게 작은 현재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현재 속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현재에만 모든 정신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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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엠마는 농부의 딸로, 어릴 때부터 서정적인 책을 많이 읽고 자란 감수성 풍부한 시골 아가씨다. 그녀는 낭만적인 생활을 꿈꾸며,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에게 시집을 간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착하지만 야망 없고 따분한 남편과 시골 생활에 엠마는 싫증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이 어릴 때 연애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행복한 여주인공이, 자신의 현재 모습이 아님에 좌절하고 남편과의 결혼을 후회한다.


반대로 남자란 모름지기 모르는 것이 없고, 여러 가지 재주에 능하고 정열의 위력, 세련된 생활, 온갖 신비들로 인도해주는 능력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사내는 무엇 하나 가르쳐줄 것도 없고, 무엇 하나 아는 것도 없고 무엇 하나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가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흔들림 없는 이 평온과 이 태연한 둔감, 그녀 자신이 그에게 안겨주고 있는 행복 그 자체에 대하여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사랑을 느낀다고 여겼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응당 생겨나야 할 행복이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었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엠마는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을 꿈꾼다. 그녀는 자신을 이 지옥 같은 일상에서 구원해 줄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린다. 어디에선가 짠하고 나타나서, 답답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줄 멋진 남자는 환상 속에만 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돌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선원처럼 그녀는 삶의 고독 위로 절망한 눈길을 던지면서 멀리 수평선의 안갯속에서 혹시 어떤 흰 돛단배가 나타나지 않는지 찾고 있었다. 그 우연이, 그녀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떤 기슭으로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인지, 그것이 쪽배 일지 삼층 갑판의 대형선 일지, 고뇌를 싣고 있는지 아니면 뱃전까지 가득한 행복을 적재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청년 레옹의 등장으로 마침내 권태로운 엠마의 삶에 균열이 생긴다. 그는 법률 사무소 서기로 일하면서, 엠마와 소통하고 연정을 품지만,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선을 넘지 않는다. 엠마는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 레옹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향하고, 엠마는 못내 아쉬워하며 그를 떠나보낸다. 미숙한 청년 레옹과 유부녀 엠마 사이 정신적 유대감은 좋은 추억으로 남을 뿐, 간음과 가정 파탄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이 시기 엠마는 적어도 최소한의 도덕과 순수함을 견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레옹은 한쪽 발을 보바리 부인이 앉아 있는 의자의 받침살 사이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색의 작은 비단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그것이 가두리 장식을 한 흰 삼베 칼라를 마치 프레즈처럼 떠받쳐주고 있었다. 그래서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얼굴의 밑부분이 옷깃 속에 묻히기도 하고 다시 살며시 드러나기도 했다. 샤를르와 약사가 잡담을 하고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이런 식으로 바싹 붙어 앉아서 우연히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가 언제나 서로 간의 공감이라는 불변의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그런 막연한 대화 속으로 접어들었다. 파리의 연극, 소설의 제목, 새로운 카드릴 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교계, 그녀가 살았던 토트, 현재 그들이 있는 용빌 등, 두 사람은 만찬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다 검토해 보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골고루 다 이야기했다.


레옹의 존재로 인해 보바리는 자신의 현실에 더욱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비난의 화살은 당연 그와의 사랑을 방해하고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 남편 샤를 보바리에게로 향한다. 그녀는 진절머리 나는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레옹과의 간통을 절제한 자신의 숭고함에 어떠한 형태의 보상도 하지 않는 남편을 증오한다.


더욱 울화가 치미는 것은, 샤를르가 그녀의 극심한 고통을 짐작조차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고 믿는 그의 확신이 그녀에게는 바보 같은 모욕으로 느껴졌고, 그런 식으로 안심하고 있는 것이 배은망덕으로 여겨졌다. 대체 누구를 위하여 정조를 지키고 있단 말인가? 샤를르야 말로 모든 행복의 장애, 모든 비참의 원인, 그녀를 사방에서 옥죄고 있는 이 복잡한 가죽 벨트의 뾰족한 가시바늘 같은 존재가 아닌가?


레옹이 떠난 이후, 엠마는 다시 공허함을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바람둥이 로돌프인데, 그와의 만남 이후 엠마의 삶은 송두리 째 바뀐다. 로돌프는 샤를 보바리를 찾았다가, 우연히 엠마를 보고 정욕을 느낀다. 여자를 잘 다루는 로돌프에게 엠마는 단지 정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는 특유의 말재간과 남성미, 그리고 보바리가 그토록 동경하는 상류층의 기호로 그녀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로돌프는 부드러운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저 여자는 분명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으리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가 커다란 우단 저고리에 흰 털로 짠 바지를 입고 층계참에 나타나자 엠마는 그 풍채에 매혹되었다.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레옹을 대하던 때와는 달리, 로돌프를 만난 엠마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해진다. 그와 시도 때도 없이 정사를 나누고, 남편 몰래 잦은 외출을 하는 등 위험한 사랑의 줄타기를 한다. 그녀의 마음속 잠재돼 있던 욕망 - 특히 성욕 - 은 로돌프를 만나면서 거침없이 분출된다. 하지만 바람둥이와의 사랑이 으레 그렇듯, 점점 더 로돌프에게 빠져드는 엠마와는 달리, 그는 엠마에게 서서히 싫증을 느낀다.


아! 이게 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시죠? 이제 나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때때로 당신이 너무나 그리울 때면 미칠 듯한 사랑에 가슴이 미어질 것만 같아요.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을 해요. 그이는 어디 있을까? 다른 여자들과 함께 있는지도 몰라. 여자들이 그이에게 미소를 지으면 그이가 다가가겠지…아! 그럴 리가 없어요. 그렇죠? 나 외에는 없는 거죠? 물론 나보다 더 예쁜 여자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깊이 당신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의 하녀, 당신의 애첩이에요. 당신은 나의 왕이고, 우상이에요. 당신은 착해요! 미남이에요! 머리도 좋고 힘도 세요!  그는 이런 말을 너무나 자주 들었기 때문에 이제 전혀 새롭지 않았다. 엠마 역시 세상의 모든 정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새로움의 매력이 옷가지처럼 한 꺼풀씩 벗겨지자 항상 같은 형태와 언어를 지닌 정열의 영원한 단조로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겨운 결혼생활에 지친 엠마는 로돌프와 함께 도주를 꿈꾼다. 하지만 로돌프는 그녀가 더 이상 흥미롭지 않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결국, 그는 엠마에게 함께 할 수 없다는 이별 편지를 쓰고, 그녀로부터 도망친다. 로돌프가 슬픔에 빠진 양 거짓 편지를 쓰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그의 가증스러운 비겁함에 희생당한 엠마에게 측은함을 느낄 것이다.


두 자루의 양초 심지가 떨고 있었다. 로돌프는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이만하면 된 것 같군. 아, 또 한 가지. 그 여자가 여기까지 찾아와 귀찮게 따라붙으면 곤란하니까」   <당신이 이 슬픈 편지를 읽을 때에는 나는 이미 먼 곳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또 한 번 보고 싶은 유혹을 피하기 위해서 되도록 빨리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약하게 가지면 안 됩니다! 나는 다시 돌아옵니다. 아마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함께 옛날의 사랑을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겠지요. 부디 안녕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녕히 Adieu>를 한번 더, 그러나 이번에는 두 마디로 나누어 <하느님에게 A Dieu>라고 썼다.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취향이라고 여겨졌다.   「자 그럼 뭐라고 서명을 한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당신의 충실한…… 아니지, 당신의 벗?…… 그렇지, 그게 좋겠어」   <당신의 벗.>   그는 편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잘 써진 것 같았다.  「불쌍한 여자!」하고 그는 약간 감상적이 되어 생각했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은 엠마를 기다리는 것은, 남편과 함께하는 지루한 현실이다. 이미 로돌프와 정열적인 일탈을 경험한 엠마는,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도피처를 갈구한다. 어느 날, 남편과 공연을 보러 간 엠마는 무대 위 남자를 보고 자신을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헛된 희망을 가져본다. 한 때 정숙한 숙녀였던 엠마는 이제 새로운 남자가 -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을 권태로운 일상에서 구원할 새롭고 특별한 사건의 매개체 - 없으면 견딜 수 없는 여자가 돼버린 것이다.


그때 그녀는 돌연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가 그녀를 바라본 것이다. 확실했다. 그녀는 뛰어나가 그의 가슴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사랑의 화신과도 같은 그의 힘 속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뛰어나가서 그의 가슴에 몸을 던져 마치 사랑 그 자체의 화신인 것 같은 그의 힘 속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그에게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나를 데려가 줘요. 자, 떠나요! 당신 것이에요! 내모든 정열도, 내 모든 꿈도!”


깊은 우울감에 빠진 엠마를 설레게 한 것은 바로 옛사랑 레옹과의 재회다. 풋내기 티가 났던 레옹은 이제 어엿한 신사가 돼서 그녀 앞에 선다. 엠마를 구원할 기사님이 등장하자, 잠재돼 있던 그녀의 욕망은 다시 꿈틀대기 시작한다.


그는 신사다운 소탈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보바리 부인은 자신의 의지보다도 강한 어떤 인력에 끌린 것처럼 기계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푸른 잎새 위로 비가 내리던 그 봄날, 두 사람이 창가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던 그 황혼 무렵 이래 그런 힘을 다시 느껴본 적이 없었다.


엠마는 더 이상 도덕의 굴레에 속박된 보수적인 여자가 아니다. 레옹과의 재회는 자연스레 간통으로 이어지고, 엠마는 다시금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로돌프가 그랬던 것처럼 레옹은 그녀가 질리기 시작한다. 인상적인 것은, 엠마 역시 레옹과의 사랑에 진부함을 느끼고 다시금 새로운 자극을 갈망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엠마가 갑자기 가슴에 매달려 흐느껴 울기라도 하면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음악도 일정량이 넘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의 마음은 시끄러운 사랑타령엔 무관심하게 졸기만 할 뿐 이제는 그 미묘한 맛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도 알아버려서 기쁨을 백 배나 더해주는 저 경이로운 소유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레옹이 그녀에게 싫증이 난 것 마늠 그녀 역시 상대에게 물려버렸다. 엠마는 간통 속에서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을 그대로 발견하고 있었다.


무질서하고 방탕한 생활을 지속하던 엠마는 결국 사채에도 손을 대고 가산을 탕진한다. 채무상환 독촉에 시달리자 그녀가 예전에 자신을 버린 로돌프를 찾아가 돈을 구걸하는 장면은, 이야기에서 가장 참담한 순간 중 하나이다. 로돌프는 예상대로 그녀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그녀는 얼이 빠진 듯 그냥 서 있었다. 의식이 깨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자신의 몸을 빠져나가서 귀청을 찢는 음악이 되어 벌판을 가득 채우며 울리는 듯한 맥박 뛰는 소리뿐이었다. 발밑의 땅은 물결보다도 더 물렁하게 출렁거렸고 밭고랑들은 밀려와 부서지는 갈색의 파도 같았다.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나 생각들이 마치 무수한 불꽃처럼 모두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다. 아버지의 모습, 뢰르의 가게, 먼 곳에 있는 그들의 방, 그리고 또 다른 풍경이 눈에 보였다. 그냥 그대로 미쳐버리는 것만 같아 무서웠지만 그래도 어떻게 정신을 차렸다. 물론 아직은 몽롱한 상태였다. 그녀는 자기를 이토록 끔찍한 상태에 몰아넣은 원인이 무엇 있는지를, 즉 그게 돈문제였음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괴로운 것은 오로지 사랑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치 부상당하여 다 죽어가는 사람이 피가 흐르는 상처를 통해서 생명이 새나가는 것을 느끼듯이 그녀는 그 기억들을 통해서 자신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불륜에 대한 수치심과 경제적 파산으로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내의 불륜과 자살에 충격을 받은 착한 남편 샤를 보바리도 결국 죽고, 부모를 잃은 딸은 방직공장으로 보내진다. 엠마의 비뚤어진 욕망은 그 자신뿐 아니라, 죄 없는 다른 가족들까지도 철저히 파괴한 셈이다.


엠마는 그 모든 배신과 천한 행동, 그리고 그녀를 괴롭히던 수많은 탐욕도 이젠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다. 삶의 끝이 지리멸렬한 생각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소리 중 엠마에게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이 가엾은 가슴의 부드럽고 희미한 간헐적 탄식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라져 가는 교향악의 마지막 메아리 같았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엠마의 자살 장면을 쓰면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의 왜곡된 욕망과 채워지지 않는 사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멸과 구토를 유발한다. 그가 신랄하게 풍자하고자 했던 것은 19세기 프랑스에 만연했던 물질, 권위, 위선 등의 부르주아적 가치관이었다. 당시 사회 지도층이었던 부르주아 계층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이 책 때문에, 플로베르는 풍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가 "내가 바로 보바리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무척 의미심장한데, 실로 그렇다. 타인의 SNS를 보며 막연한 환상과 부러움을 느끼고, 지칠 줄 모르고 신용카드를 긁어대는 현대인은 곧 엠마 보바리의 후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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