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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15. 2018

<호밀밭의 파수꾼> - 순수한 인간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는 사회에 찌든 중년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명장면, 철로 위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는 이 남자의 인생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는 챕터별로 남자의 인생의 기(期)를 보여주며, 한 인간의 순수가 어떻게 부식되어가는지 담담히 보여준다. 첫사랑이 건네준 박하사탕 하나에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고 기뻐했던 순박한 영호는 점차 폭력적인 형사로, 바람을 피우는 남편으로 변해간다.

영화는 순수했던 영호가 때 묻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호는 보통의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순수는 희석된다. 모든 어른들은 - 심지어 백발의 노인까지 - 내면에 순수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살면서 받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인해 아이는 동굴 속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른들은 '능숙한 사회생활'을 위해, 아이를 꼭꼭 감추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누구나 마음 한편에 순수를 보존하고 있다. 더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한편, <어린 왕자>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어른들이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뭐지? 나비를 수집하니?”라고 묻는 대신 어른들은 “나이는? 형제는? 체중은?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벌어?”라고 묻는다. 오직 이런 숫자를 통해서만 어른들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들에게 “창문에는 예쁜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앉아 있는 장밋빛 벽돌집을 봤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은 그 집에 관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른들에게는 “십만 프랑 짜리 집을 봤어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어른들은 “어이쿠, 정말 굉장한 집이구나!”라고 감탄한다.


온갖 기호에 노출돼 자란 사람들은 - 숫자는 기호의 가치를 측정하는데 유용하다 - 대상의 본질보다는 그것에 투사된 상징적 표식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아주 어린아이에게 가방은 단지 소지품을 담는 사용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기호의 우열을 학습하고, 이들이 가방의 브랜드를 구별할 수 있게 될 때, 가방은 더 이상 단순한 가방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상징적 표식인 것이다. 


이때, 상징적 표식은 상품뿐만 아니라, 직업, 사는 곳, 취향 등에도 부여되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슨 일 하세요?" 혹은 "어디 사세요?"라고 물으면서 이 사람의 지위를 가늠하는 것은 현대인들 사이 만연한 수법이다), 이것은 곧 주체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한다. 순수한 본질보다는 겉치레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질서이자 규범이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결코 이러한 기호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보존하는 순수의 정도는, 상류 기호에 대한 집착 및 위선과 가식의 수준과 반비례한다.


이와 관련, 샹포르는 그의 생각을 명쾌하게 밝혔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태도로, 합리성과 진실한 마음을 갖추고, 관습이나 허영이나 격식 같은 상류사회의 소도구 없이 우리를 대하는 사람들만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멍청하고 허약하고 흉물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우리는 결국 혼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일정한 수준의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면의 순수한 어린아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질 때, 상징적 표식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 숫자에 연연할 때, 차오르는 눈물을 의연하게 삼킬 수 있을 때, 거리의 꽃과 밤하늘의 별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적이 생각나지 않을 때, 사랑하는 대상에 애정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때, 그리고 변하는 모든 것에 무뎌질 때. 이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되는데, 이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유명인들을 살해한 테러범들이 애독했던 책이다. 특히 비틀스의 멤버 존 레논을 저격한 마크 채프먼은 "모든 사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 고 말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 책은 더욱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이처럼 자극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순수'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닐까. 어른들의 세계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치기 어린 주인공 홀든은, 곧 순수했던 우리의 과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느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zJMbuFp0-i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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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10대 소년이다. 소설은 홀든이 네 번째 퇴학을 당한 후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며,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선을 따라간다. 그는 부모에게 차마 퇴학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며칠간 뉴욕을 홀로 방황한다. 심성이 착한 홀든은 차마 못된 짓은 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일탈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에서 독자는 연민을 느낀다.


홀든은 거짓, 가식,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에 지독한 환멸과 구토를 느낀다. 작가는 중2병에 걸려 매사에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godamn"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홀든은 기성세대가 만든 질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어른들을 비웃는다. 다음은 홀든이 선생과 나누는 대화의 일부이다.


“장래에 대해서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스펜서 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저는 괜찮을 거예요. 이건 한순간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살아갑니다. 저도 그런 겁니다. 선생님. 제발 더 이상은 제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시합이지. 맞아, 인생이란 규칙에 따라 하는 운동 경기와 같단다.” “예, 선생님,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홀든의 속마음)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


소설이 출판된 1950년대 미국은 전쟁과 대공황을 거친 후,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중산층의 황금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평범한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집과 차를 사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사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속물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홀든이 풍자하는 허영 가득한 사람들은, 이 시기 일반적인 중산층의 모습이었다.


언제 한번 남학교에 가봐. 시험 삼아서 말이야. 온통 엉터리 같은 녀석들뿐일 테니. 그 자식들이 공부하는 이유는 오직 나중에 캐딜락을 살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야. 축구팀이 경기에서 지면 온갖 욕설이나 해대고, 온종일 여자나 술, 섹스 같은 이야기만 지껄여대. 더럽기 짝이 없는 온갖 파벌을 만들어, 그놈들끼리 뭉쳐 다니지 않나.


우리 숙모는 자선사업은 꽤 많이 하고 있었다. 적십자니 뭐니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고 있었는데, 옷차림도 활동만큼이나 요란스러웠다. 그런 자선과 관련된 일을 하러 나갈 때마다 언제나 차려입고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다 어쩐다 하면서 치장을 하는 것이다. 자선에 관련된 일을 할 때는 검은 옷만 입고, 립스틱도 바르지 말아야 한다면, 숙모는 그런 일을 할 것인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샐리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에. 그녀에게 밀짚 바구니를 들고 모금을 하게 만들려면, 사람들이 헌금할 때 온갖 아첨을 떨어야 할 터였다. 그렇지 않고, 바구니에 돈만 넣고는 사람들이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가버린다면, 한 시간도 못 돼서 그만두고 말 것이다. 금세 지겹다고 난리 치고는, 바구니를 던져버리고, 뽐내면서 점심이나 먹으러 어디론가 가버릴 것이다. 이래서 내가 수녀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굉장히 슬퍼지는 것이다. 그녀들은 뽐낼 만한 곳에 가서 점심을 먹지 않는 것이다. 


변호사는 괜찮지만....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되면 자기가 엉터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


한편, 매사에 반항적이고 까칠한 홀튼도 애정을 느끼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여동생 피비다. 피비에 대한 홀든의 정다운 관심과 배려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피비는 어른들의 세계에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상징이다. 


피비가 목마를 타고 돌아가고 있는 걸 보며, 불현듯 난 행복감을 느꼈으므로, 너무 행복해서 큰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홀든에겐 원래 남동생 앨리도 있었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사망했고, 이에 홀든은 크게 상심한다. 앨리가 죽은 날, 분에 못 이겨 차고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부수는 바람에, 홀든은 주먹을 잘 쥐지 못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홀든은 앨리를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 애가 죽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그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니? 그래도 좋아는 할 수는 있는 거잖아. 죽었다고 좋아하는 것까지 그만둘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더군다나 우리가 알고 있는 살아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천 배나 좋은 사람이라면 더욱 말이야.


날씨가 좋을 때면 아버지와 엄마는 앨리의 무덤으로 가서 그 위에 꽃다발을 얹어놓곤 하셨다. 나도 몇 번 같이 갔었지만, 얼마 못 가 그만두고 말았다. 우선은 무엇보다도 앨리를 그런 곳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자들과 비석에 둘러싸인 그런 곳은 싫었다. 그나마 해가 떠 있을 때는 봐줄 만했다. 하지만 그곳에 갔을 때, 두 번이나, 무려 두 번이나 갑작스러운 비를 만났던 것이다. 그때는 정말 끔찍했다. 앨리의 비석 위로도, 앨리의 배를 덮고 있는 잔디 위로도 비가 내렸다. 공동묘지 전체에 비가 내렸다. 묘지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난 또 미칠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저렇게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서 라디오를 틀고는, 좋은 곳으로 저녁식사를 하러들 갈 것이다. 앨리를 저렇게 내버려두고. 그 사실이 나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무덤 속에 있는 건 동생의 껍데기일 뿐이고, 영혼은 천국인지 어딘지에 있다느니 하는 허튼소리는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애를 이런 곳에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 동생이 어떤 아이인지 알지 못한다. 알게 된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만, 모름지기 태양이란 자기 멋대로 나왔다 들어가는 법


소설의 제목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의 장래희망이다. 그는 순수한 아이들이 때 묻은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홀든은 우연히 들은 노래에서 영감을 얻고, 순수를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순수한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낸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홀든은 지긋지긋한 뉴욕을 떠나 서부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집으로 돌아가고, '사회 부적응자' 낙인이 찍힌 채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그가 남긴 여운 있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인상적인 것은 작가 샐린저 자신이 홀든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책 덕분에 일약 스타 작가가 되지만, 은둔생활을 하며 세인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심지어 <호밀밭의 파수꾼>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헐리우드의 제안에, 샐린저가 "홀튼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 라며 단칼에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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