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지배 #2
휴가를 뜻하는 프랑스어 바캉스(vacances)와 영어 vacation은 ‘해방, 자유, 텅 비워냄’을 의미하는 라틴어 vacātio에서 유래했다. 여가를 의미하는 영어 레저(leisure)도 ‘자유로워지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licere와 연관이 있다. 한국어에서 여가는 ‘남을 여(餘)’와 ‘틈 가(暇)’도 한자가 합쳐진 단어다. 즉, 여가는 단조로운 일상과 고단한 생업의 의무에서 벗어나 남는 틈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여백의 시간이다. 여가는 바쁨의 지배에서 벗어나 기력을 충전하며 차분히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며, 인간이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이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Ovidius)가 “여가는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여가는 사람의 생(生)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원시 시대의 여가는 하루하루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힘겨운 생존을 완수한 후에야 주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가의 형태도 다양하지 않았고, 속성도 일회성이 컸다. 당시 원시인들은 사냥을 마친 후 멍하니 동굴 밖을 바라보거나, 돌을 깎거나, 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것 정도가 여가의 전부였을 것이다. 원시인들은 시간을 정하고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존에 필요한 활동 및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유 시간이었지만 여가의 형태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여가는 자유로운 시민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노예들이 노동을 하는 사이 시민들은 철학, 미술, 종교, 그리고 축제를 향유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여가가 인간 삶의 궁극적 지향점이기에 일은 여가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그는 심지어 여가를 제대로 사용하는 능력은 인간 생활에 기초가 되므로 시민들에게 적절한 여가 사용법을 훈련시키지 않는 정치가는 비난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 시대의 여가도 그리스와 비슷했다. 풍부한 노예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로마 시민들은 한 해에 200일간의 휴일을 즐겼다. 로마 여가에는 특징이 있다. 시민들의 잠재적 폭동이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흥 시설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이때 여가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행태가 아니라, 주로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로마 시민들은 투기장에서 검투사와 맹수의 격투를 관람하고, 극장에 모여 연극을 보고, 호화로운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즐기는 등 쾌락적인 여가 활동을 즐겼다.
중세 시대에 접어들며 여가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향락적인 여가를 즐긴 로마 제국이 저물고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애써 여가를 지양하도록 어릴 때부터 훈육받는다. 종교는 인간이 게으름을 피우고 유희를 즐기는 것에 죄의식을 느껴야 한다며 금욕을 강요했다. 내세를 위해 신을 숭배하고 종교적 규율을 따를 것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유나 게으름은 악(惡)으로 치부됐고 여가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러다가 르네상스가 도래하며 여가는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예술은 종교적 규율에 억눌려 있던 유희를 향한 인간의 본성을 깨웠다.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책이 대중화됐고, 귀족과 왕족의 지원으로 오페라와 미술, 문학, 발레 같은 예술 활동이 권장됐다. 특히나 로마 시대에 벌어진 향락 위주의 여가와는 달리, 르네상스 시대의 여가는 교양 증진의 수단으로써 향유됐다. 이 시기 예술가들은 풍부한 여가를 만끽하며 수많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촉발되고 노동을 신성시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확산되며 다시 여가를 죄악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다소 섬뜩한 말이 버젓이 성경에 있을 정도로 종교인들은 근면과 성실을 강조했다.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인간이 열심히 사는 것은 소명이요, 이렇게 해야 내세에 신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 게으름은 악마라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가급적 여가를 적게 보내고 많이 일할 것을 대중에게 주문했다.
“빈둥거리며 지내는 것은 신체와 생명을 망친다. 새가 날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인간은 노동을 위해 태어났다.”
근대 산업 혁명을 거치고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순수한 의미의 여가는 종말을 맞이한다. 자본가들이 임금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일할 것을 강요하며 여가는 다시금 상류층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됐다. 도시로 모인 평범한 노동자들은 여가를 누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고, 잠시나마 갖는 여가도 다시금 일하기 위해 체력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사유 재산의 축적이라는 강력한 경제적 동기는 사람들이 한가롭게 여가를 즐기는 대신 좀 더 생산성 높고 성과 있는 일을 하도록 부추겼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여가와 멀어졌다.
20세기 초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만화 <개미와 베짱이(The Grasshopper and the Ants)>에서 근면하게 일하는 개미는 선(善)으로, 게으르게 여가를 즐기는 베짱이는 악(惡)으로 묘사된다. 이는 당시 미국인들이 가졌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잘 보여준다. 이렇듯 서구권에서 비롯된 노동을 중시하고 여가를 죄악시하는 삶의 태도는 제국주의를 거치며 열강의 식민 지배를 받은 동양권에도 급속히 전파됐다. 강대국들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약소국 시민들의 민족성을 폄하하며 게으름을 말소시키려 했다.
자본주의 및 세계화가 성숙 단계에 진입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여가는 20세기 들어 다시 부흥기를 맞은 것처럼 보인다. 중산층의 출현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 자동차와 세탁기, 전구 같은 발명품들은 인류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주었다. 게다가 대중 매체 및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별다른 돈이나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여가를 즐길 수단이 무궁무진하게 많아졌다. 하루 종일,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면서 누구나 여가를 향유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에 따라 달라진 여가의 행태는, 오늘날 ‘비워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한 듯하다. 여가의 본래 형태는 뺄셈이다. 일상에서 쌓인 피로나 번뇌를 비워내고 자유로워지는 것. 때때로 산책을 하거나 명상을 하고 색다른 경험을 하며 자신을 일상에서 격리시키는 것. 하지만 현대의 여가는 덧셈의 형태다. 일상과 완전한 단절이 어렵기 때문에 현대인은 여가를 ‘다음 해야 할 일을 위한 준비 태세’처럼 대한다. 현대인에게 여가는 노동과 소비의 연장선이다. 현대사회에서 여가는 그 본래적 기능 -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는 여백의 시간 - 을 잃어버렸다.
현대인은 여행을 가고, 드라마를 보고, 스포츠를 배우는 등의 활동을 향유하면서도 다가올 일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때때로 휴식 시간을 즐기는 것에 죄의식마저 느낀다. 회사 밖에서도 분주히 이메일을 체크하고, 스마트폰으로 인해 상사 혹은 고객에게 24시간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않다. 혹은 더 나은 성과를 내기 위해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만 이렇게 여유를 즐겨도 되는 것인지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여가는 일종의 ‘기호에 대한 경쟁’처럼 변질되어버린 경향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근사한 맛집을 가고, 꾸준한 운동으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얼마나 고상하고 값비싼 상류의 취미 활동을 하는지를 낱낱이 SNS에 올리며, 그러한 여가를 즐기지 않는 (혹은 못하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지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기 때문에 여가를 즐기는 와중에도 자유롭지 않다. ‘비워냄’이라는 여가의 목적이 자신과 타인을 구분 짓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해당 내용은 도서 <사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진 않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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