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증후군

바쁨의 지배 #3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는 과정에서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부조리한 인습이 깨졌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목소리 냈던 이들은 기성 사회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저항하며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인습은 쉽게 변하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고 변화는 때때로 큰 희생을 요구하기에, 전진의 발걸음은 대개 더디기 마련이고 때로는 실패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급격하지만 성공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와 지위를 쟁취한 종(種)이 있으니 바로 여성이다.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여성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점은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과 세계화가 확산되기 이전 아주 오랜 옛날부터 곳곳에서 성차별이 존재했다는 점을 미루어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인종 차별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만성적으로 행해졌다고 볼 수 있다. 몇 백 년 전에 누군가 ‘미래는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고 정치 및 경제 활동을 활발히 하며, 심지어 기업이나 국가의 총책임자가 되는 시대일 것’이라고 말했다면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현대 여성의 지위 상승을 야기했는가. 가장 중대한 계기 중 하나는 전쟁이다.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국가는 승리를 위해 여성을 동원해 전쟁터에 끌려간 남자들의 공백을 메우고 생산성을 극대화하려 했다. 이 시기 국가는 ‘할 수 있다’는 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며 여성의 사회 참여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여성은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병원, 공장, 군대 등에서 유감없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했고 사회는 인적 자원으로써 여성의 가능성에 대해 재고하게 됐다. 여성이 가정 밖에서도 훌륭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이후, 남아선호 사상이 약해지고 사람들은 여성의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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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의 확산도 여권 신장에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 계획되지 않은 임신은 여성의 삶에 치명적인 제약을 가한다. 피임이 발달하기 전 수천 년 동안, 여성들은 관계를 가진 후 원치 않는 임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콘돔과 피임약의 보급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선택권을 부여함으로써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도와줬다.


또한 가전제품의 발달로 가사에 드는 육체노동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면서 여성들은 가사를 제외한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나 세탁기는 빨래를 단 한두 시간 내에 해결해주며 여성을 지겹고 단순한 중노동에서 해방시켰다. 오죽하면 교황청이 20세기 여성 해방의 일등 공신으로 세탁기를 꼽았을 정도니, 세탁기가 여성의 지위 향상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과 경제력이 높아지고 사회 활동에 대한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평등을 향한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들은 계급투쟁 역사상 전례 없는 속도로 신속하고 성공적으로 그리고 광범위하게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했다. 여성 차별은 옳지 않다는 명제가 20세기에 대대적인 공감을 얻기 시작하면서 각 국에 여성 문제를 전담하는 부처가 생기고, 세계 여성의 날이 지정됐으며,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서서히 바뀌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지만 과거와 비교할 때 여성들이 짧은 시간에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것은 분명하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 제고, 출산 휴가의 증가, 가정 폭력과 성범죄에 관한 문제의식 등이 그 결과를 보여준다. 21세기 비약적으로 상승한 여성의 지위 및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여성 리더들의 모습을 200년 전 가부장적 조선 양반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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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여성의 활발한 경제 활동과 지위 상승은 여성의 삶의 가속화를 야기했다. 일터와 가정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상충될 수밖에 없기에 현대 여성은 일뿐만 아니라 가사노동이라는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셈이다. 이처럼 직장과 가정에서 여성에게 과중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으며, 이를 온전히 충족시키려면 여성은 원더우먼이 되어야 한다. 《타임 푸어(Overwhelmed)》의 저자 브리짓 슐트(Brigid Schulte)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유능한 기자이자 엄마로서, 직장과 가정을 오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워킹맘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이상적인 노동자인 동시에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현대사회의 기대와 압박이 ‘일하는 여성’의 삶을 가속화시킨다는 그녀의 주장에 무척 동의한다.


실제로 일하는 현대 여성은 일과 휴식 사이 적절한 균형을 찾기가 쉽지 않다. 가정에서는 육아, 직장에서는 업무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쁨의 스위치가 켜져 있는 이들은, 아마도 현대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시간 빈곤을 느끼는 계층일 것이다. 특히나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 가정적인 어머니’ 등의 구시대적인 성역할은 일하는 여성으로 하여금 강박을 느끼게 하고, 이들의 시간을 앗아간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 속, 일하는 여성은 일과 가정 가운데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받기 때문에, 출산을 꺼리거나 경력 단절 여성이 된 채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분명 여성에게 집안일의 의무만 주어졌던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부담이다. 비록 과거 여성들의 지위는 열악했지만, 이 당시 여성들의 바쁨의 강도는 현대 여성의 그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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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현실과 인식의 괴리다. 여성의 역할이 가정에서 사회로 확장됐지만 여전히 가사 및 육아는 여자 담당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만약 부부가 모두 일을 한다면, 남편이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전부 여성에게 떠넘기거나 마치 남성이 선심을 쓰듯 돕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한국은 ‘명절 증후군’, ‘시월드(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처럼 '시(媤)'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 즉 '시댁'을 비꼬는 신조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양상이다. 게다가 가정에 시간을 쏟는 여자는 대개 일터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이후 여성의 경력은 단절되거나,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현실과 인식의 괴리 때문에 현대 여성은 일반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이냐 가정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해당 내용은 도서 <사실, 바쁘게 산다고 해결되진 않아>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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