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고급 기호 소비"라는 규칙
어느덧 연말이다. 화려한 조명으로 범벅이 된 거리엔 캐럴이 찬란히 울려 퍼지고 배 나온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아르바이트생의 시급은 얼마일까 문득 궁금해진다)가 사려 깊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준다. 특급 호텔은 로맨틱한 경험을 제공하는 커플 패키지를 선보이고 여행업계는 근사한 휴양지를 홍보하며 휴가를 가라고 부추긴다. 백화점과 고급 식당에는 황금색 종이 달린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다. 번화가의 술집과 클럽에는 외로운 청춘들이 모여든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온갖 기호와 네온사인은 연말 내내 도시를 점령한다.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크리스마스 (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합성어인 그리스도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는 종교인의 날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종교적 의미는 사실상 퇴색됐고 이는 상업적인 축제로 변질되었다. 특히 근현대 접어들어 미국 기업들은 크리스마스를 철저히 상업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비수기인 겨울철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1931년 산타클로스를 마케팅에 활용했다. 오늘날 우리가 산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 흰 수염에 인자한 미소를 짓는 뚱뚱한 백인 남성 - 코카콜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개도국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서구권의 크리스마스 문화는 급속도로 세계에 전파됐다. 한국이 크리스마스를 대중적인 축제로 취급하게 된 것은 불과 수 십 년 밖에 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가족들끼리 시간을 보내는 서구권과는 달리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커플들의 기념일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커플들은 크리스마스에 특정한 규칙을 따를 것을 요구받는데, 이는 바로 고급 기호 소비다. 상업주의가 마련한 준칙에 의해, 이들은 영화나 공연을 본 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선물을 교환하며, 호화로운 호텔에서 '로맨틱한' 섹스를 하도록 유도된다. 이때 고급 기호 소비는 상당한 강제력을 띈 의무이며 이것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무례'한 처사로 여겨진다. 왜 크리스마스가 커플을 위한 날인지, 왜 상당한 프리미엄을 지불하면서까지 크리스마스에 고급 기호를 소비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찌질'하다.
단언컨대, 크리스마스야말로 '사랑한다면 소비하라'는 정언이 가장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날이다. 수많은 시시껄렁한 기념일들 -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로즈데이 - 따위는 크리스마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SNS는 이와 같은 정언을 확대 재생산하는 확성기다.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인해 - 과시, 허영, 타인의 인정 갈구 등 - 애인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고 전파한다. (어느 장소를 갔고, 어느 선물을 주고받았고, 어떤 여행지를 갔는지 등등) 이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참여자들이 '어떤 커플이 크리스마스에 가장 행복한가' (보다 정확히는 더욱 상위의 고급 기호를 소비했나) 게임에 동참하고, '사랑한다면 소비하라'는 정언은 더욱 공고해진다.
결국 대다수 한국 커플은 상업주의가 연출한 크리스마스 각본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크리스마스 = 고급 기호 소비"라는 규칙은 견고한 제도이자 약속이고 의무이다. 원래 종교인의 날이었던 크리스마스를 연인들의 기념일로 탈바꿈시킨 것은 실로 탁월한 상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은 인간이 가진 최고의 능력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이를 활용해 다수로부터 이익을 취했던 것은 지극히 소수였다. 크리스마스란 무엇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lweWKFeC88k&t=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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