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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r 26. 2019

냉전시대에 태어난 인터넷

#2-1 인터넷 - 디지털 제국주의 1.0

역사의 렌즈를 통해 제국의 흥망성쇠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의문점이 생긴다. “왜 몰락한 제국의 엘리트층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까?” "왜 이들은 저쪽 앞 코너의 모퉁이에 제국의 붕괴를 초래할 블랙스완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는 전적으로 무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제국의 엘리트층은 ‘자신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때문에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사안의 의사결정권이 있는 엘리트층은 너무나 빈번하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는 항상 어리석음의 역사이다.


우리는 20세기 미국과 소련이 주도한 냉전 시대에서도 어리석음의 역사가 똑같이 재현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경제 체제의 차이가 미국과 소련 제국의 명운을 가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계획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는 시장경제를 지향한 자본주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칼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은 야심 차게 지배 권력을 전복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들의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실 ‘만인의 평등’이라는 공산주의의 이념은 ‘탈중앙화’라는 블록체인의 이념과 유사한 면이 있는데,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나중에 서술하도록 하겠다.   


미국과 소련의 차이점은 비단 경제 체제뿐만이 아니었다. 이 글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냉전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훗날 후손들의 삶과 국가 경쟁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터넷에 대한 각 제국의 태도가 상이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은 냉전의 산물이다. 소련의 핵미사일에 안보의 위기를 느낀 미국은 군사용 네트워크 개발에 착수했고 이때 등장한 미국 군사용 네트워크 아르파넷 (ARPANET)이 인터넷의 모태이다. 1969년 10월 29일, 스탠포드 연구소가 아르파넷을 활용해 ULCA에 메시지를 전송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컴퓨터가 다른 컴퓨터에게 말을 거는 일이 발생했다.


인터넷을 창조한 것은 미국 국방부였고 군사 안보가 최대 목적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산업의 발전을 주도한 것은 미국 내 민간 기구들의 자율적인 참여였다. 1970년대 인터넷 산업은 상당히 탈중앙화 된 실험의 장이었다. 호기심 많은 컴퓨터 엔지니어들과 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인터넷 산업에 점점 더 많은 참여자들이 진입하고 아르파넷과 유사한 네트워크들이 생기면서 갖가지 도전 과제가 생겨났다. 상이한 특성의 네트워크들을 어떻게 상호 연결시킬지, 어떤 표준을 사용할 것인지에 등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다.


혁신가들은 인터넷 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제록스의 연구원이었던 로버트 멧칼프는 이더넷이라는 LAN 기술을 발명했다.  LAN을 통해 근거리에 있는 컴퓨터들의 네트워크를 연결시키는 이더넷은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그러나 당시 제록스 경영진은 이더넷의 잠재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로버트 멧칼프는 제록스를 퇴사하고 1979년 3Com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그가 개발한 이더넷 덕분에 1980년대 들어 LAN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인터넷은 차츰 대중화되었다.


인터넷 프로토콜 표준인 TCP/IP를 만든 빈턴 서프와 로버트 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네트워크를 엮는 네트워크는 중앙의 통제가 없어야 하며 어느 특정 애플리케이션이나 데이터 패킷의 형태에 최적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83년 아르파넷이 TCP/IP로 전환하면서 그들의 생각은 실현됐다. TCP/IP 덕분에 내부 구조가 다른 수많은 컴퓨터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거대한 네트워크가 구축된 것이다.


또한, 1889년 월드 와이드 웹을 창시한 팀 버너스-리도 인터넷 산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유럽 핵 연구 기구에서 일하던 그는 입자 물리학자들의 연구 관리 프로그램으로 쓰이던 ‘엔콰이어’의 전 지구적 버전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인터넷 트래픽 형식인 월드 와이드 웹의 기원이다. 월드 와이드 웹의 발전도 인터넷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탈중앙화 된 방식으로 이뤄졌다.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만들어 낸 웹 페이지의 하이퍼링크는 다른 웹 페이지로 이동시켜주는 통로로 기능한다. 단지 클릭 몇 번만으로 전 세계 웹 페이지를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인터넷 산업 발전의 기회가 미국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62년 소련의 천재 과학자 빅토르 글루쉬코프는 계획경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분산화된 컴퓨터 인터넷 네트워크인 오가스 (OGAS)를 구상했다. 모스크바에 중앙 컴퓨터 허브를 두고 이와 연결된 수많은 분산 노드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그가 떠올린 소련식 인터넷의 모습이었다. 빅토르 글루쉬코프는 ‘국가 경제의 통치, 계획, 회계를 위한 정보 수집 및 처리의 국가 자동 시스템’을 정부에 건의하며 인터넷 산업 발전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소련 재무부 장관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1970년 이후 소련의 인터넷 개발은 중단되었다.


민간이 주축이 된 미국이 숨 막힐 정도로 빠르게 인터넷 산업의 발전을 이끄는 사이 소련의 중앙 정부는 인터넷 산업의 잠재력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소련은 핵무기를 늘리고 우주에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것을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계획경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자 소련의 엘리트층은 1980년대 들어 뒤늦게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도 인터넷이 미래 산업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점을 소련 엘리트층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빅토르 글루쉬코프의 선견지명은 그렇게 소련 엘리트층의 무지에 의해 완벽히 퇴적되었다.


만약 소련의 엘리트층이 미래를 좀 더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었다면 어땠을까? 뒤늦게라도 인터넷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빅토르 글루쉬코프가 제안한 프로젝트를 밀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이러한 논의는 무의미하다.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소련의 후신 러시아가 오늘날 인터넷 산업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이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그나마 얀덱스라는 현지 인터넷 기업을 키워냈지만 이마저도 구글의 공세를 근근이 견디는 수준에 불과하다.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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