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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07. 2019

무책임한 엘리트가 초래하는 경제 위기

#4-2 비트코인 본위제

2008년 금융위기는 상처를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자산 가격이 폭락했으며 시민들이 낸 세금이 대형 은행 구제 금융에 사용되었다. 그런데 당시 금융위기를 방조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챙기면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했다. 예를 들어,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 재무부 장관을 지낸 티모시 가이트너는 세금으로 금융 기관들에게 대규모 구제금융을 해줬는데 이 덕분에 당시 월가의 최고 경영자들은 막대한 보너스를 챙길 수 있었다. 티모시 가이트너는 재무부 장관을 그만둔 이후 월가에 고용되어 거액의 경제적 보상을 받았다. 잘못된 선택을 한 엘리트들이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이 피해를 입은 것은 다수의 시민들이었다. 금융위기를 계기로 대형 기관 및 제도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비트코인이 대안 금융으로서 주목받은 바 있다.


사실 이런 불공평한 게임이 연출되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택과 책임의 불균형은 늘 비극을 낳았는데 비극의 주인공은 대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었다. 특히 경제는 이와 같은 비극이 너무나 빈번하게, 그리고 파괴적으로 일어나는 영역이다. 엘리트들이 의도를 했든 의도를 하지 않았든 간에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만 엘리트들은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역사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중요한 것은 엘리트들이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에서 화폐를 통제하는 힘을 가질 때 십중팔구 경제위기가 닥친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할 정도로 오랜 시기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때때로 디플레이션이 경제를 위협한 경우도 있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가 위기에 처한 경우가 훨씬 많다. 실제로 화폐를 통제할 권한을 지닌 엘리트들은 무책임하게 신뢰를 저버리는 선택을 너무나 자주 했다. 이들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거나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의 가치를 조작하거나 무분별하게 화폐를 찍어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앞서 강조했듯, 화폐의 근간은 신뢰이다. 한 번 신뢰가 깨지면 화폐 경제가 예전처럼 제대로 작동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신뢰를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인 법이다. 그리고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다.


경제학자 귄터 슈묄더스에 의하면,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에서 최초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사트 (Shat)라는 금속화폐가 쓰였다. 그런데 금 함유량이 15그램이었던 사트의 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낮아졌다. 급기야 금화는 은화로 바뀌고 나중에는 은화마저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집트 엘리트들이 의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작해 사리사욕을 채웠는지는 불분명하다. 화폐 시스템이 바뀐 이유가 종교적 이유라는 견해도 있고 (고대 이집트에서 금은 신의 피부, 은은 신의 뼈라고 여겨졌다) 금은 보유량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사트에 함유된 금의 순도가 낮아지고 화폐의 형태가 변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재산이 증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은 거대한 제국을 파괴할 만한 힘이 있다. 한때 강력한 문명을 구축했던 로마는 인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파국을 맞았다. 기원전 3세기 로마는 데나리우스 은화를 발행한 이후 기원전 1세기부터는 금화 아우레우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재원 마련을 위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은화와 금화에 구리를 섞어 유통시킨 것이다. 이때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데나리우스의 은 함유량을 줄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244년 고티구스 황제 시절 데나리우스의 은 함유량은 고작 5% 수준으로 하락했다. 구리가 들어간 데나리우스는 가치를 잃었고 물가가 폭등하면서 로마 시민들은 고통을 받았다.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다수가 고통받는 비극이 연출된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냐면 심지어 로마 정부도 세금으로 데나리우스를 받지 않고 순은을 요구했을 정도이다.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지자 로마의 황제들은 물가를 통제하고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미 로마 화폐에 대한 신뢰는 무너진 상태였고 경제 붕괴로 인해 로마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은행가 페르디난드 립스는 <Gold Wars>에서 당시 로마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무너진 화폐에 대한 신뢰를 복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 황제들이 경제를 ‘관리’하려는 데 몰두했지만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라는 사실에는 현세대 투자자뿐 아니라 현대 케인스주의 경제학자도 주목해야 한다.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고 법정통화를 관리하는 법을 제정해 봤자 밀물을 막으려는 노력과 다를 바 없었다. 폭동, 부패, 무법, 맹목적 투기와 도박 열풍이 역병처럼 제국을 휩쓸었다. 화폐의 가치가 하락해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당시에는 상품을 만들기보다 상품에 투기하는 편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인플레이션은 또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19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국민총생산 2년 치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이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독일은 마구 화폐를 찍어내기 시작했는데 마르크의 가치는 1922년 7월 1달러당 493마르크에서 1923년 11월 무려 4조 2천억 마르크로 하락했다. 경제가 어려움에 처하자 독일 시민들은 크나큰 슬픔에 빠졌다. 이를 기회 삼아 극우세력이 정권을 잡았는데 이게 바로 히틀러의 나치이다. 나치는 시민들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활용했고 유대인을 증오의 표적으로 삼아 독일 내에서 승승장구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은 우리가 아는 역사이다. 나치의 주도하에 2차 세계 대전이 발생했고 인류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잘못된 선택에 책임을 지지 않는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다수가 고통받는 비극은 독일의 사례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이 외에도 인플레이션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소수의 엘리트가 화폐를 통제할 권한이 있는 한, 인플레이션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는 화폐를 통제하는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영향력이 전례없는 수준으로 높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민들이 힘겹게 축적한 재산의 가치가 소수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폭락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뜻이다. 물론 과거의 엘리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현대의 엘리트들이 화폐를 조작하는 일은 투명성을 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설사 엘리트들이 선량한 마음씨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의도한 대로 경제가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경제 현상을 올바로 해석하고 예측해서 알맞은 정책을 내놓을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낙관에 몹시 회의적인 편이다. 오늘날 지구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경제의 사슬로 얽혀 있다. 이는 지구 경제가 블랙스완에 노출된 위험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5세기 로마의 경제 위기는 당시 고구려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지금은 일개 중국 기업의 파산이 금융 시장을 공포로 몰아 세계 경제를 뿌리째 흔들 수 있다. 물론 전문가들은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들의 재무 건전성이 개선되었고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이 튼튼해졌다고 말한다. 이는 일견 사실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블랙스완이 출현했을 때, 변덕스러운 금융 시장과 세계 경제가 이를 맞이할 대비가 충분히 되어있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 전문가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서점의 경제 서적 코너를 주의 깊게 들여다 보라. 최고의 경제 전문가라고 평가받는 (타인에게 인정받았다기보다는 출판사의 마케팅을 위한 자의적 평가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해 보인다) 사람들이 저마다 상이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과거에 발간된, ‘예측’, ‘전망’, ‘미래’ 등의 단어가 들어간 책들의 내용을 돌이켜 보면 전혀 엉뚱한 맥을 짚은 경우가 수도 없이 많다. 비교적 정확하게 경제를 진단한 사람들조차도 매번 옳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의 경제 위기를 예측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음번의 경제 위기까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경제 전문가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ookjournali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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