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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10. 2019

바람직한 화폐의 조건

#4-4 비트코인 본위제

화폐가 되기 위해서는 가치의 측정, 교환의 매개, 가치의 저장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가치의 저장이 중요하다. 바람직한 화폐가 되기 위한 최대의 조건은 가치를 안전하게 저장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책임한 엘리트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는 역사적 사례를 너무도 많이 지켜봤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짐에 따라 가치 저장 기능이 고장 나는 것은 화폐의 역사에서 항상 발생하는 비극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글로벌 통화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 달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화폐의 가치 저장 기능이 중요한 이유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미는 힘은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 요인이다. 미래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가치를 저장하는 화폐를 통한 자본의 축적이 불가하다면 실현되지 않는다. 바나나를 먹고 버리는 원숭이와는 달리 인간은 돌 덩어리나 조개껍데기에 가치를 저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화폐의 역사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다.


화폐가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수급에 따른 희소성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개념이다. 어떤 재화든 가치 저장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수요가 늘어 가격이 오르더라도 특정 주체가 쉽사리 공급량을 조절할 수 없어야 한다. 만약 A라는 재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 가격이 치솟는 상황에서 더 많은 A를 획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노동력과 자본을 투하함에 따라 공급량이 쉽게 증가한다고 생각해보자. 공급량이 늘어나 희소성이 희석되는 과정에서 A의 가치 저장 기능 역시 하락할 수밖에 없다. 가치 저장 기능을 하는 재화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금은 탁월하게 가치 저장 기능을 수행하는 화폐이다. 다른 금속 대비 금은 녹슬거나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불변의 가치를 지닌다. 다시 말해 2,500년 전 로마의 화폐로 쓰이던 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금으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게다가 금은 화학적 특성으로 인해 인위적으로 제조될 수 없기 때문에  (연금술에 대한 심도 높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성공을 거둔 바는 없다) 금을 새롭게 획득하는 방법은 오직 정직하게 땅을 파고 채굴하는 것뿐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 채굴 단가가 싸졌다고 하더라도 금은 매년 약 2% 수준으로만 증가하며 희소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금과 경쟁한 것은 은이다. 하지만 은도 화폐로서 금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선, 은의 연간 공급량은 5~10% 수준을 유지하다가 최근에는 20% 전후로 증가했는데, 희소성의 측면에서 은은 금보다 열위에 있다. 또한, 한때 은은 소규모 거래에 쓰이며 금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금본위제가 확산됨에 따라 종이돈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화폐로서 은의 기능은 사실상 없어졌다. 오늘날 은은 단지 산업용 금속이나 귀금속에만 쓰일 뿐, 금과 같은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처칠이 민주주의가 가장 덜 나쁜 제도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나는 금이 가장 덜 나쁜 화폐라고 생각한다. 완벽한 화폐는 없다. 금도 디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다만 바람직하지 못한 수많은 화폐들 대비 금이 갖는 장점이 단점보다 많을 뿐이다. 특히 수천 년에 걸쳐 가치 저장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 금에 대한 신뢰는 다른 화폐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금은 권력을 가진 특정 주체가 통제할 수 없기에 무책임한 엘리트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롭다. 달러의 명운이 전적으로 미국에 달린 것과는 달리 금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지을 주체는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재산을 안정적으로 보존한다는 측면에서 금은 개인이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금이 훌륭한 화폐라는 증거는 화폐를 발행하는 각 국의 중앙은행들조차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은행은 유사시에 대비해 주요국 외화와 금을 의무적으로 보유하는데, 각 국이 벌이는 화폐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금이다. 때문에 달러로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미국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한 국가라는 점은 당연한 이치다. 인상적인 것은 최근 들어 달러 패권에 불만을 품은 국가들이 공격적으로 금을 매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금 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8년 세계 각 국 중앙은행들의 금 순 매수량은 전년 대비 74% 증가했는데 이는 1971년 금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최대의 수치다.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반미 국가들이 똘똘 뭉쳐 미국보다 금을 많이 보유한 뒤 새로운 글로벌 통화 시스템을 제안한다면 미국의 달러 패권에 금이 갈 수도 있다. 물론 미국이 이를 좌시하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ookjournali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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