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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May 11. 2019

디지털 금으로 진화하는 비트코인

#4-5 비트코인 본위제

비트코인과 가장 유사한 형태의 화폐는 서태평양 미크로네시아 연방에 속한 야프 (Yap) 섬의 라이 (Lai)이다. 가운데에 큰 구멍이 뚫린 원반 형태의 돌인 라이는 야프섬 주민들이 쓰는 화폐이다. 라이의 원재료인 석회암은 야프 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근처 팔라우 섬에서 이를 채굴한 뒤 카누를 통해 들여와야 한다. 무거운 돌인 라이를 나르고 야프 섬으로 들여오는 과정이 몹시 힘들기 때문에 라이의 공급량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러한 특성은 라이가 바람직한 화폐로 기능할 수 있게 해 준다. 실제로 19세기 서양의 제국주의자들이 야프섬을 침략하기 전까지, 라이는 수 백 년 이상 야프섬의 화폐로 문제없이 쓰였다. 


라이의 단점은 너무 무거워서 운반하기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라이는 무게가 4톤 가까이 나가는데 매번 거래할 때마다 무거운 돌을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야프섬 주민들은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라이를 움직이지 않고도 라이 소유권의 이전을 주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리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라이의 소유주 A가 거래 대금 지급을 위해 B에게 “자, 이제 저 돌은 네 것이다.”라고 말하면 야프섬 주민들은 B가 라이의 새 주인임을 인정한다. 참고로 이는 공개 분산 원장을 활용하는 비트코인이 작동하는 방식과 무척 유사하다.


야프섬의 라이 이야기는 비트코인 신봉론자들에게는 유명하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이 비트코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쉽고 직관적인 표현이 필요한데, 나는 “디지털 금”이 비트코인에 대한 최적의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2100만 개로 공급량이 정해져 있어 희소성을 지닌다는 점, 특정 주체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 상당한 자원을 투여해야만 획득이 가능하다는 점, 경제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식하는 추종자들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 단지 금이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반면 비트코인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무형의 코드일 뿐이다. 


비트코인이 금보다 유용한 점은 개인의 경제적 자주성과 연관이 있다. 금과는 달리 비트코인은 권력의 횡포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유롭게 가치를 저장하고 국경을 초월해 가치를 이전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가령, 유형자산인 금은 국가의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1930년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개인이 보유한 금을 몰수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반미 국가들의 환율이 요동치고 경제가 망가지는 과정에서, 반미 국가의 시민들은 안전하게 금을 보유하기 여의치 않아진다. 정세가 극도로 불안해지면서 정부와 은행마저 신뢰할 수 없게 되고 내전이 발발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집 금고에 금괴를 보관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가치의 저장과 이전이라는 관점에서 비트코인은 최고의 수단이다. 아무에게도 허락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참여해 자기 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트코인은 금과 확연히 다르다.  비트코인으로 가치를 저장한 개인은 개인키만 알고 있으면 제삼자의 간섭에서 벗어나 전 세계 어디로든지 이를 전송할 수 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를 떠나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은 돈을 번 뒤 본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활비를 대기 위해 비트코인을 활용한다. 베네수엘라 시민들은 부패한 국경 수비대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의 짐을 뒤져 쓸만한 현물이 나오면 이를 갈취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나 막대한 수수료를 뜯어가는 환전상을 거치지 않고도 비트코인을 통해 경제적 자주성을 지키게 된 것이다.    


한편, 비트코인이 디지털 금으로서 주목받게 되면 가장 손해를 보는 쪽은 어디일까? 당연 금과 연관된 이해관계자들일 것이다. 세계 금 협회가 비트코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로 2018년 세계 금 협회는 “암호화폐는 금의 대체제가 아니다 (Cryptocurrencies are not substitute for gold)” 보고서를 발간하며 비트코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해당 보고서의 논리는 결함이 많은데, 이를 반박하는 것은 의미 있는 논의가 될 것이다. 세계 금 협회가 발간한 보고서의 내용과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1. 금은 비트코인보다 변동성이 낮다: 1970년대 금과 2010년대 비트코인의 가격 변동성은 유사한 수준이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폐지한 이후 금값은 엄청난 변동성을 보이며 폭등했다.  만약 1970년대에 인터넷과 모바일 그리고 누구나 온라인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 거래소가 있었다면 금 가격 변동성은 분명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투기 수요에 따른 높은 변동성은 새롭게 출현한 투자 자산이 겪는 성장통이다. 비트코인 가격의 변동성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인데 이는 비트코인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2. 금은 비트코인보다 유동성이 풍부하다: 비트코인 시장에는 아직까지 기관 투자자의 자금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지 않았다. 월가의 금융기관들은 기관 대상 비트코인 관련 인프라를 깔고 있는 상황인데 이는 기관 투자자들의 자금 유입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비트코인 시장에 기관 자금이 유입된다면 유동성이 높아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3. 금은 규제된 환경에서 거래된다: 세계적으로 비트코인을 비롯한 디지털 자산을 취급하는 업체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거래소는 인허가제로 바뀌고 있는 추세인데 이렇게 되면 비트코인도 충분히 규제된 환경에서 거래될 수 있다. 


4. 금은 투자 포트폴리오에서의 역할이 뚜렷하다: 다양한 투자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비트코인과 다른 자산군 (주식, 채권, 부동산, 달러 등)의 상관관계는 낮다. 자산군 간 상관관계가 낮다는 것은 포트폴리오 위험분산 효과가 탁월하다는 뜻이다. 피델리티 자산운용이 미국 411 개 기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 의하면 (2019년 5월 발표), 이 중 40%는 5년 내 디지털 자산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기관 투자자들이 비트코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바로 포트폴리오 위험 분산 효과 때문이다.


5. 수급 측면에서 금은 비트코인과 겹치지 않는다: 금이 재무적 용도뿐 아니라 산업용 금속이나 귀금속으로 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연간 금 수요 중 약 40% 는 재무적 용도로 중앙은행 준비 통화, 투자 자산 등으로 활용된다. 가치 저장 수단인 비트코인은 재무적 용도로 쓰이는 금과 역할이 유사하다. 만약 비트코인이 성공적으로 디지털 금으로 자리 잡게 된다면 금 산업은 일부 잠식될 여지가 있다.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ookjournali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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