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블록체인 왕좌를 둘러싼 전쟁
PC 시장의 발전을 이끈 IBM은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정보통신산업에서 포식자 역할을 한 제국은 IBM이었다. 매킨토시를 내놓은 애플이 IBM을 ‘빅 브라더’로 묘사했을 정도로 IBM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PC 시장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IBM처럼 하드웨어를 제조하는 회사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막대한 수익을 내지 못했다. PC 시장 발전의 과실은 오히려 반도체를 제조하는 인텔과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이 PC 제조에 뛰어듦에 따라 IBM 같은 PC 제조업체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환골탈태를 위해 IBM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수익성이 낮은 사업부를 과감하게 정리하고 기업의 성장 동력을 하드웨어 제조에서 소프트웨어 서비스로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2002년 IBM은 PwC 컨설팅사업부를 인수했다. 또한, 2005년 IBM은 기업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PC 사업부를 레노버에 매각했다. 과감한 결단 덕분에 IBM은 격동하는 정보통신 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IBM은 인터넷, 스마트폰, 클라우드 등 몇 번의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혁신 경쟁에 밀린 채 정보통신 산업의 왕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IBM보다 사업 규모가 훨씬 작았던 기업들이 재빨리 기회를 포착해 디지털 제국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IBM은 분명 배가 아플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록체인의 등장은 IBM에게는 과거의 실기를 만회할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IBM은 불확실성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간 ‘퍼스트 무버’들이 시장을 독식하는 사례를 수 차례 지켜봤다. 때문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IBM은 과감히 블록체인 사업 확장에 힘을 쏟고 있다. 참고로 IBM이 제공하는 블록체인 솔루션은 리눅스 재단의 하이퍼레저 페브릭을 기반으로 한다. 하이퍼레저 페브릭은 허가된 기업만 참여할 수 있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이며 특정 디지털 자산 발행을 요구하지 않는다. IBM은 하이퍼레저 페브릭을 블록체인 산업의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파트너들과 협력하고 있다.
우선, IBM은 블록체인이 도입될 가능성이 높은 산업으로 물류를 지목했다. 2018년 IBM은 세계 최대 해운 회사 머스크와 손을 잡고 블록체인 물류 플랫폼인 트레이드 렌즈를 출범했다. IBM의 하이퍼 렛저에 기반한 트레이드 렌즈는 무역 상품의 거래 및 선적, 그리고 운송 과정에서 소요되는 수많은 서류들을 줄이는 것이 목표이다. 해운 산업은 중개인과 불필요한 서류 작업이 많은 것으로 악명 높은데 트레이드 렌즈는 블록체인 솔루션을 통해 비효율성을 개선하고자 한다. 인상적인 것은 트레이드 렌즈가 유력 해운사인 MSC와 CMA-CGM의 협력을 이끌어내며 머스크의 경쟁사까지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IBM은 또한 유통 분야에서도 블록체인 기술 활용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다. 2018년 IBM이 출시한 푸드 트러스트는 안전하고 효율적인 식품 생태계 구축을 위해 만들어진 블록체인 플랫폼이다. 식품의 원산지, 가공, 운송 등의 정보를 블록체인에 실시간으로 기록함으로써 식품 이력을 추적하고 유통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이다. 기존에는 식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처리하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됐지만 IBM 푸드 트러스트를 활용하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IBM 푸드 트러스트는 월마트나 네슬레 같은 유통 공룡들을 파트너로 확보하며 생태계 확장을 가속화하고 있다.
금융도 IBM 블록체인의 주요 관심 분야이다. 2019년 IBM은 IBM은 72개국에서 47가지 통화를 지원하는 실시간 글로벌 금융 결제 네트워크인 월드와이어를 출시했다. 스텔라 프로토콜에 기반한 월드와이어는 저렴하고 빠른 크로스보더 결제를 지원한다. 사실 IBM은 스텔라, 리플, 은행이 발행한 스테이블 코인 (JP모건이 발행한 JPM 코인이 대표적이다) 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결제 수단이 될지 여부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글로벌 금융 결제에 기반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 솔루션을 제공함으로써 관련 시장을 독식하고 싶을 뿐이다. 참고로 글로벌 대형 은행들의 97%가 IBM의 고객이며 전 세계 신용 카드 거래의 90%가 IBM의 메인프레임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월드와이어는 글로벌 금융 결제 시장 혁신을 주도하기에 무척 유리한 상황이다.
인상적인 것은 IBM 블록체인 디지털 화폐 사업을 총괄하던 제스 룬드가 이런 말을 했다는 점이다. “나는 비트코인의 가격이 언젠가 백만 달러 (한화 약 12억 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지닌 20조 달러 유동성이 법인 간 결제 같은 분야들을 어떻게 바꿀지 생각해봐라” IBM은 비트코인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보다는 프라이빗 블록체인 생태계 구축에 공을 들이는 기업이다. 그런데 어째서 IBM 블록체인 디지털 화폐 사업의 핵심인력인 제스 룬드는 비트코인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는 비트코인이 무역금융에 활용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제스 룬드는 저 발언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IBM을 퇴사했다.
북저널리즘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7월에 책이 출간됩니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내용을 일부 삭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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