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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Oct 13. 2019

누구나 가슴속에 시를 품고 있다

영화 <시>를 보고

미자는 화사한 의상을 즐겨 입고 꽃을 좋아하는, 소녀 같은 감수성이 있는 할머니다. 어느 날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시 수업을 수강하게 된 미자. 그녀는 "누구나 가슴속에 시를 품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시를 써보려 하지만 쉽사리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사는 손자가 저지른 충격적인 범죄를 알게 된 미자는 고통스러워한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부터 위로를 얻는 미자. 그녀는 이따금씩 느끼는 경이로운 감정을 자그마한 수첩에 기록하고 서서히 자신만의 시를 완성해 나간다. 수업의 마지막 날, 모든 수강생들은 각자의 시를 완성하고 선생님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시를 완성한 사람은 미자뿐. 미자는 마지막 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어딘가로 떠났다. 꽃과 시만을 남긴 채. 다음은 그녀가 지은 시.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은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의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 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마음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영화에서 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주제로 말한다. 사랑을 할 때, 아이를 낳았을 때, 내 집 마련을 했을 때 등 저마다의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들. 미자는 어릴 적 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시를 써야겠다고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은 이후, 미자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다. 빨갛게 핀 꽃, 길거리에 떨어진 살구, 살랑거리는 풀 바람. 남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이런 사소한 것들이 미자에게는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그녀는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미자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아름다움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일상에서 가급적 많은 것을 느끼고 기록하기 위해 분주히 레이더를 돌린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순간을 관찰한다. 지하철에 앉아 있는 사람들 저마다의 스토리를 상상해 본다. 밤에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본다. 걷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잊어버릴까 무서워 재빨리 모바일에 기록한다 그렇게 조금씩 채집된 영감의 잔해들이 쌓이다 보면, 추상적이고 모호했던 생각이 서서히 뚜렷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일상의 기록은 한 편의 시가 된다.


누구나 가슴속에 시를 품고 있다.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될 자격이 있다. 등단한 사람만이 시인이라는 법은 없다. 눈으로 보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자는 모두 시인이다. 시인은 아침의 안개를, 정오의 태양을, 붉은 저녁노을을, 밤하늘의 별을 가슴으로 느끼는 자이다. 시인은 떨어지는 낙엽에 슬퍼하고 까르르 웃는 아이의 천진함에 기뻐할 줄 아는 이다. 시인은 일상의 초원에 숨겨진 경이로움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발견하는 자다.


마지막으로, 가을에 어울리는 시를 소개한다. 스산한 바람이 부는 날에는 기형도를 읽는 것이 좋다.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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