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중섭 Jul 31. 2020

위선에 대하여

영화 <더 스퀘어>를 보고

*스포일러 주의*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영역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나눠 갖습니다"

- 영화 속 스톡홀름 현대 미술관에 설치될 예정인 작품 '더 스퀘어'의 문구 -


영화의 주인공은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이다. 준수한 외모의 크리스티앙은 잘 나가는 예술인이자 진보적인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크리스티앙은 또한 이따금씩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마음씨 따뜻한 부자이며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느 날, 크리스티앙이 핸드폰과 지갑을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완벽해 보였던 그의 민낯이 드러난다. 위치추적 기능을 통해 소매치기범이 사는 빌딩을 파악한 크리스티앙. 하지만 정확한 호수 파악을 못한 크리스티앙은 소매치기범이 사는 빌딩에 사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낸다. 그런 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꼬마의 사과 요구를 외면하고, 은근하게 하층민을 무시하고, 손상된 예술 작품을 남몰래 인위적으로 수정하고, 일 때문에 만난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더 스퀘어가 표방하는 신뢰와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감독은 크리스티앙이 망가지는 과정을 신랄하게 풍자하며 관객들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웃지 말라고. 당신도 결국 크리스티앙 같은 위선자가 아니냐고"


영화에서 위선자로 묘사되는 것은 비단 크리스티앙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배경은 복지 국가로 유명한 스웨덴이고, 주요 등장인물들은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현학적인 언어로 예술에 대해 아는 척하고, 틱 장애를 가진 사람을 조롱하고, 이민자를 경계하고, 작품 관람보다 뷔페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외면한다. 그들이 딱히 나쁜 사람들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일 뿐이다.


그들의 위선 수준은 오랑우탄 흉내를 내는 행위 예술가가 등장하는 씬에서 극대화된다. 야만적인 행위 예술가는 도를 넘은 폭력성을 띄는데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 나만 걸리지 말아라" 고 마음속으로 빌고 있다. 폭력을 행사하던 행위 예술가는 급기야 한 여성을 겁탈하려고 하는데, 보다 못한 노인이 그를 제지하려고 하자 방관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앞다투어 행위예술가를 집단 폭행한다.

한편, 영화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씬이 있다. 미술관 방문객은 ‘나는 인간을 믿는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문구가 적힌 두 가지 방향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전자는 42, 후자는 3인 것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인간을 믿는다’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 가능한가? 만약 내가 영화 속 미술관에 방문했다면 나는 후자를 선택했을 것 같다. 나는 한 개인이 지닌 선악의 수준과 그 사람을 믿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 그 자체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믿으려고 하는 편이다. 나는 공공연하게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따위의 고고한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지위나 명성만큼이나 추악한 면모를 숨기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영화를 다 보고 <시계태엽 오렌지>에 나오는 다음의 대사가 떠올랐다.


 "아, 여러분 이 세상 어디에도 사람에 대한 믿음이란 있을 수 없어.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

독서할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 책을 리뷰하는 '21세기 살롱'이라는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분만 투자하면 책 한 권의 개괄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watch?v=IbaEPgbTTbk&t=1s















매거진의 이전글 이기심만큼 정직한 인간의 본성이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