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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Sep 03. 2020

이 땅의 모든 로미오와 줄리엣을 위하여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도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보고

나는 확신하련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中)

*스포일러 주의*

사랑하는 연인이 부모의 반대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는 서사는 오늘날 낡아빠진 전래동화 취급을 받는 것 같다. 적어도 연애의 단계에서는 말이다. 보통의 현대인들은 실로 다양한 수단을 통해 자주적으로 짝을 찾아 나서고 부모의 통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연애를 한다. 그러나 결혼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는 사례를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연인들은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면 결혼 아니면 이별을 이분법적으로 택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때,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할 시, 둘 만 있던 무대에 부모라는 관객이 개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부모에 맞서 투쟁하는 사랑은 픽션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내 주변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한 사례가 없다. 부모의 반대라는 암초에 부딪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연인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다. 특히나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것이 많은 사람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결혼까지 성공하고, 아이까지 낳아 보란 듯이 잘 사는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상대방 부모로부터 거절당하는 과정에서 쓰라린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것을 보면 이 역시 평범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점은, 옛날에는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을 하는 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모가 정해준 생면부지의 사람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사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숙명이었다. (과거에는 연애결혼이라는 개념 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로맨틱한 서사는 생겨난 지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데이트가 생겨난 지는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결혼의 종말>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규범이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고 밝혔는데, 오늘날 이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결혼에 있어서, 지난 이백 년간의 변화는 이전 이천 년간의 변화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지난 이백 년간 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이 결합했고 여성은 섹스와 출산을 분리할 권리, 이혼할 권리, 결혼하지 않을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온라인 데이팅과 같은 새로운 만남의 매개체가 등장했다. 또한, 낭만적인 사랑, 정열적인 섹스, 가정의 안정감, 이 세 가지를 모두 결혼이라는 '올인원 패키지'를 통해 충족시킬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결혼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실제 결혼 생활을 수행하는 부부들로 하여금 참담한 실망감을 느끼도록 했다. 결혼의 진화 속도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향후 이십 년간의 변화가 과거 이백 년간의 변화보다 더욱 급진적일 수 있다는 합리적인 유추를 해볼 수 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도서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인공 마리안느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주기 위해 고용된 화가이다. (참고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모두 여성이다) 둘은 서로의 매력에 빠져들고 남몰래 사랑을 탐닉한다. 그러나 짧은 사랑의 유통기한이 끝나자 엘로이즈는 결국 부모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생이별을 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주인공 티타는 페드로와 사랑에 빠지지만 막내딸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 부모의 수발을 해야 한다는 집안 전통에 좌절한다. 페드로는 티타 대신 그녀의 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하는데, 티타와 페드로의 사랑은 은근하고도 정열적으로 지속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주인공들의 사랑은 사회적인 시선, 관습, 부모의 반대 때문에 결코 순탄치 않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사랑을 완성한다. 결말이 해피엔딩이었는지 여부를 떠나, 그들이 진실한 사랑을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사랑이 지극히 개인적인, 당사자들만의 스토리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주인공이 되는 특별한 스토리. 내면의 아이가 깨어나는 천진한 스토리. 하늘이 온통 무지개로 뒤 덮여 낮과 밤이 분간이 안 되는 황홀한 스토리. 이것이 바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스토리이다. (사랑에 '빠진'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행위이다) 사랑이 결부된 연애나 결혼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애와 결혼 스토리의 주인공은 결코 제삼자가 될 수 없다. 오로지 사랑의 당사자들만이 이 스토리의 시작과 끝을 함께할 특권이 있다. 나는 불행히도 부모가 반대하는 사랑을 시작해버린 모든 로미오와 줄리엣을 응원한다. 사랑에는 정답이 없다. 가장 개인적인 사랑이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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