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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Oct 01. 2022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요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집요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감독의 분신인 남자 주인공은 보통 지식인으로 등장하는데 찌질하게 여자를 밝히고 엉뚱한 면이 있다. 정확히 어떤 영화인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잘 알지도 못하면서>인 것 같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 대뜸 학생이 묻는다. "근데 감독님은 왜 항상 자기 이야기만 해요?" 여기에 남자 주인공은 답한다.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요."


나를 잘 안다는 것. 본인의 기질과 성향과 욕망과 힘과 약점과 꿈과 두려움과 정체성을 안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 자신을 모른 채 적당히 연기하며 살다가 죽는다. 라캉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면서 말이다. 내 생각에, 누군가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를 둘러싼 세계가 한 번 이상은 붕괴될 필요가 있다. 붕괴된 세계가 재창조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자아가 잉태되고 그는 비로소 성숙한 "인간"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붕괴를 체험하는 일은 보통 좌절, 고난, 실패, 결핍, 방황 등과 같은 부정적인 사건에서 비롯된다. 살면서 우여곡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층에 균열을 내는 특정한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세계가 스스로 붕괴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세계의 붕괴를 체험하지 못한 자는 인간으로 거듭나지 못한 채 행복한 돼지로 남기 십상이다. '그것은 그렇다'에 고개를 끄덕이며 여물을 먹는 동물 농장의 돼지.


살면서 세계의 붕괴를 체험한 일이   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비로소 내면에 잠재된 인격체를 발견하고 나에 대해 한  더 이해할  있었으니까. 새롭게 탄생한 자아의 갑옷을 입은 나는  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전능을 얻은 네오의 마음이랄까. 나를 비교적  알고 있다는 . 내게는 이것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원동력이자 자부심이었다. 당시 나의 변화를 지켜본 사람  하나는 "뇌의 회로가 바뀌어 버린  같다" 평가를 했다.


그런데 최근에 사랑에 관한 가치관 변화를 겪으면서 세계는 다시 한번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강력한 파열음을 내면서 세계의 지층이 뒤틀리고 있는 것이다. 가령, 그동안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나'에 초점이 맞춰진 인격체였다. 그러나 인간이란 모름지기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인격체도 있게 마련이다. 나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 이기적인 인격체에 대한 이해가 거의 전무했다. 그 결과,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고 공감을 하는데 서툴렀고 지금은 이 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


나는 지금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에 관해, 마음이 통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하면 지도가 있잖아. 처음에는 본진 주변만 보이지만 게임이 진행되고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이제는 지도 전체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지. 그런데 게임 플레이 시간이 꽤 지났는데 불구하고 최근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도의 구석이 발견됐어. 그동안 지도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당혹스럽네" 이 말을 듣고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들어보니까 아예 지도가 바뀐 것 같은데?"


나도 날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해요. 홍상수 감독이 이 대사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었을 당시 그의 나이는 약 50세이다. 50세 지천명은 하늘의 뜻도 아는 나이라던데. 나는 과연 50세가 된다고 해서 나를 잘 알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아마도 앞으로 몇 차례 세계는 붕괴를 반복할 것이고 나는 그때마다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새롭게 잉태된 자아와 변화된 세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과연 다음에 세계를 붕괴시킬 매개체는 무엇일까? 결혼? 육아? 종교? 성 정체성? 정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 다가올 변화가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설렌다. 내 안에 우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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