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변화에 대한 생각
나는 요새 가치관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20대의 나는 성공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30살의 나는 자유와 예술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2-3년 전의 나는 재미라고 답했을 것이다. 현재의 나는 여기에 덧붙여 사랑이라고 답하고 싶다. 여기서 사랑은 비단 가족이나 연인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그리고 좋아하는 상대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것뿐 아니라, 미운 상대를 용서하는 것 역시 내가 정의하는 사랑의 범주에 포함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1년 전에 나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던 시기였다. 사랑만 빼고. 죽을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큰 수술이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누워서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보는 것뿐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도 금지되고 병원 내 사람과의 소통은 거의 없었다. 아마도 나중에 늙어 홀로 요양원에서 지낸다면 이런 삶을 살겠구나 싶었다. 외로웠다.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인상적인 순간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이다. 침대에 누워 이동하는 과정에 보았던 하얀 병원 조명, 영안실처럼 춥던 수술 대기실, 수술대에 누워 꽁꽁 묶인 몸, 마취를 앞두고 어렴풋이 들리는 간호사들의 일상적인 대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 평소에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초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꼴이 우스웠다. 수술이 끝나고 간호사가 괜찮냐고 물었다. "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답변하면서 마취에서 깨어난 것에 정말 기뻤다. 살아있다! (아, 근데 존나 아프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인생을 들이켜보았다.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무탈하게 잘 살았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면서 진실한 태도로 살았다. 반칙하지 않고 기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음 한편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생각해보니 사랑이 인생에서 우선순위 었던 적이 없었다. 보다 상위의 우선순위인 가치를 위해 (성공, 자유, 예술, 재미) 각종 핑계를 대며 사랑을 등한시했다. 후회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은 외로웠으면서. 죽기 전에 충만한 사랑을 해보는 것이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경험인데.
솔직히 그동안 사랑이 인생의 최고 가치관인 사람들에게 크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나에게 허락된 청춘을 큰 불멸을 (밀란 쿤데라에 따르면, 불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작은 불멸은 사후에도 그를 사랑했던 주변 사람들이 소소하게 추억해주는 것이고 큰 불멸은 뛰어난 업적을 남기어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성취하는데 사용하고자 했고, 사랑의 정원을 가꾸고 세심하게 돌보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으며, 마땅히 요구되는 사랑의 역할극에도 서툴렀다.
왜 그랬을까? 왜 이렇게 사랑에 무심했을까? 서른 즈음 글쓰기에 눈을 뜨고서 이것에 천착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제야 매트릭스에서 해방되어 제대로 사는 것 같았다. 좋은 글을 남기고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감을 주는 것이야 말로 내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왠지모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조급해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니까. 아직 써야할 이야기가 많은데. 내 안에 뜨거운 불꽃이 있는데.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릴까 두려웠다. 절박하게 매달리면서 생각했다. 모든 것을 가질 수 는 없다. 시간은 제한적이다. 선택은 포기다. 다른 것을 선택하는 대신 사랑을 포기하자. (여기에서의 사랑은 개인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사랑을 완전히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찾은 비겁한 절충안은 ‘사랑 저 너머의 왕국'을 짓고 이곳에서 무언가에 몰입해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혼자 책, 영화, 미술 전시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 버리거나. 일에 몰두하거나. 지금처럼 글을 쓰거나. 쓸쓸하면서도 평온한 상태. 딱히 외롭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랑 저 너머의 왕국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었으니까. 웬만큼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랑 저 너머의 왕국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출입을 크게 제재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순적인 것은, 사랑 저 너머의 왕국에도 사랑이 존재하기는 한다는 것이다. (사랑 저 너머의 왕국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아마 이 점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왕국에서의 사랑 대비 다소 제한적인 양상이긴 하지만. 혹은 사랑의 대상이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다른 종, 인류, 신, 사물, 예술인 경우도 있고.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후로 내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은 이것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진단하는지에 달려 있으니까. 많은 부분에 있어서, 문제의 원인은 나에게 있고 해결책 또한 나에게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랑 저 너머의 왕국을 떠난, 지나간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이 사라지는 대신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부끄러움이 생겼다. 비겁하고 옹졸했구나.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한편, 여전히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문제는 내가 인지하지 못한 나의 특성을 파악할 때 나타난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아, 나는 그동안 장미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장미를 좋아했었구나" 이럴 때마다 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고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금세 반성을 하곤 하는 편이다.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오만한 잣대를 기준으로 타인을 섣불리 판단했구나. 이런 과정이 되풀이될 때마다, 나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느낀다.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겨온 가치. 성공, 자유, 예술, 재미는 여전히 나에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로 이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랑이 최고다. 희생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나의 에고일 것이다. 나의 에고가 용해될 때만이 비로소 고차원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사랑 저 너머의 왕국을 붕괴시키고 길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넘어지고 깨지고 방황하고 상처받을 것이다. 여전히 서투른 실수를 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르게 성장하는 과정임을 나는 믿는다 (믿고 싶다)
내가 사랑 타령을 하며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수년 뒤의 나는 아마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재밌다. 다가올 운명, 사계절의 순환, 변화하는 나와 세계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다. 나와 가족과 연인과 타인과 세계를 사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