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외노자로서 느낀 이런 저런 생각들
나는 홍콩의 외국인 노동자다. 홍콩에서 일한다고 하면 한국의 친구들의 대부분은 "홍콩에서 살고 좋겠다. 홍콩 가봤는데 맛있는 음식 많고 야경도 너무 이쁘잖아"라는 반응이다. 글쎄 과연 그럴까? 며칠 혹은 몇 주간 여행을 가는 것과 현지인이 돼서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가령 나는 개인적으로 유럽의 멋진 풍경과 근사한 음식, 유서 깊은 문화를 동경하지만 느려 터진 행정 업무처리, 치안, 비영어권 국가에서의 언어문제 등으로 유럽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본디 여행을 통해 짧은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 및 기억은 대개 미화되기 마련이다. 똑같은 와인을 마셔도 한국의 시끌벅적한 바에서 먹는 것보다는 파리의 에펠탑 근처에서 은은한 샹송을 들으며 먹는 것이 훨씬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나는 약 1년 정도를 홍콩에 살았는데,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한국과 홍콩의 차이점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홍콩의 외노자로서 느낀 점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특히나 화려한 홍콩의 야경 뒤에 감춰진 애로사항들을 통해 막연히 홍콩 사는 것에 환상을 품고 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장점
1. 균형 있는 일과 삶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장점인 것 같다. 물론 회사마다 부서마다 다르겠지만, 전반적으로 홍콩의 일과 삶의 균형은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나다. 한국에 만연한 쓸데없는 회식, 접대, 야근이 없으며 회식을 한다 하더라도 팀 디너, 팀 런치 등 간단히 1차만 하고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회식이 있다 해도 개인 사정이 있으면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안 나올 수 있고, 대개 가족을 직장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2. 수평적인 조직 관계
보스와 팀원들이 외국인일 경우 좋은 것은 수평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의 상사를 대할경우, 우리나라 어법 상 당연히 존댓말을 해야 하고 깍듯이 예를 갖추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수직적인 구조가 심화되면 팀원 간의 건강한 토론을 저해하고 까라면 까라는 군대문화를 양산할 수도 있는데, 다행히 홍콩은 한국과 비교 시 상당히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가지고 있다.
3. 많은 여행기회
홍콩은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여행기회가 정말 많다. 인접한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대만 등은 한국에서 제주도나 일본을 가듯이 주말에 짬을 내어 갈 정도로 가깝고 물가도 싸기 때문에 홍콩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이다.
4. 낮은 소득세율
홍콩은 낮은 소득세율로 유명하다. 한국의 경우, 최고 세율이 40%인 반면 홍콩의 최고 세율은 10% 중후반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홍콩의 많은 고소득 샐러리맨들의 경우 낮은 세율 덕분에 홍콩을 벗어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도 많다. 게다가 홍콩은 상속세도 면제이기 때문에 세금 폭탄을 피하기 위해 자산가들이 많이 몰린다.
5. 한류로 인한 한국인들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태양의 후예, 별에서 온 그대 등 한국 드라마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이다. 물론 로컬 홍콩 사람들이 왜 자기 주변 한국인들은 송중기나 김수현처럼 생기지 않았냐는 반문을 품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홍콩에서 한국인이라고 하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것이다.
6. 필리핀 Nanny (유모)의 보편화
홍콩에서는 필리핀 내니를 고용하는 게 상당히 보편화돼있고 가격도 부담스러운 수준이 아니다. 아이가 있는 가정의 경우, 아예 가정에 상주해서 집안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해 파트타임으로 고용할 수 있는데 2시간에 3만원 이내의 금액으로 합리적인 수준이다. 단 주말에는 주인집에서 묶지 못하는 필리핀 내니들이 거리에 나와서 맥도널드나 공원등에서 집단 노상을 하는데, 나이 많은 분들이 거리에서 노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착잡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단점
1. 살인적인 렌트
홍콩의 빽빽한 고층 아파트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홍콩의 렌트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다. 때문에 렌트비를 줄이기 위해 룸메와 같이 사는 경우도 많고 아니면 직장과 먼 곳에 집을 얻는 경우도 자주 있다. 싱글 남자의 경우 룸메 없이 혼자서 홍콩 섬 (많은 오피스 및 편의시설은 이쪽에 밀집해 있기에 싱글들은 홍콩 섬에 사는 경우가 많다)에 위치한 스튜디오에 살 경우, 대략 180-300만 원 정도를 월세로 낸다. 따라서 소득 수준이 일정수준 되지 않는다면, 월세를 내고 나면 잔고가 없는 깡통 통장이 되기 쉽다. 심지어 타 업종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연봉을 받는 홍콩의 젊은 뱅커들도 하우징이 지원되지 않는다면 (회사에서 렌트비를 내주는 경우가 있는데 요새는 금융업의 불경기로 인해 많이 없어지고 있는 추세다) 높은 월세로 인해 저축을 하기가 녹록지 않은 현실이다.
2. 만연한 자본주의 및 물가&소득 수준의 양극화
어디든 안 그러겠냐만은 홍콩에서는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삶이 극명하게 갈린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놀랐던 점은 중가 수준의 제품이나 서비스가 홍콩에는 많이 없다는 것이다. 오직 외국인들이나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가 아니면 중국에서 넘어온 혹은 현지 서민들이 즐기는 저가의 제품 및 서비스들 뿐이다. 가령, 음식을 먹는다고 쳐도 적당한 수준의 만만한 가격대를 찾기가 힘들다. 비싸거나 싸거나. 홍콩에서는 물가 수준이나 소득 수준이 상당히 양극화돼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높은 렌트비와 생활비가 맞물려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있지 않으면 홍콩은 살기 빡빡한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3. 높은 인구 밀도
홍콩은 좁은 땅 떵어리에 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살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은 편이다. 한적한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외출하는 것 자체가 진 빠지는 일이 될 수 있다. 홍콩에서는 한적한 공원, 카페 등을 찾기가 정말 어렵다. 따라서 카페 같은 곳에서도 한 테이블을 2-4명이서 나눠서 앉는 경우도 무척이나 흔한 일이다.
4. 결혼상대 만나기 어려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홍콩은 나이 좀 있는 싱글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홍콩에 사는 노총각 노처녀들이 정말 많은데 신기한 것은 마땅히 빠지는 것이 없는 사람들인데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외국인들과 연애 후 결혼하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만나던 이성을 데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결혼 적령기인 홍콩 싱글의 경우 소개팅 혹은 선을 보기 위해서 주말마다 한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게다가 해외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집안에서의 잔소리 및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고 주변에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싱글들도 많기 때문에 굳이 결혼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한국에 비해서는 많은 것 같다.
5. 습하고 더운 날씨
그나마 홍콩의 11월-3월은 선선한 가을 날씨로 하이킹 가기도 좋고 외투도 제법 두꺼운 옷을 입고 다니지만, 나머지 기간 동안은 무더운 여름의 지속이다. 에어컨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이고 습도도 무척 높아 한여름에는 불쾌지수가 상당히 올라간다.
이러한 장단점 외에도 내가 홍콩에서 살면서 느낀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홍콩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사람들을 (이곳에서는 중국인들을 mainland China라고 부른다) 별로 안 좋아한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으니 중국인이나 홍콩인이나 그게 그거 아니야?"라고 외국인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분명 홍콩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본인들을 중국인들과 구별 짓기를 원한다.
사실 홍콩 사람들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보면 이러한 반중국 정서의 배경이 이해가 된다. 일단 홍콩 집값이 폭등하게 된 이유도 중국자본 때문이고, 양질의 일자리또한 중국인들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있다. 때문에 많은 홍콩의 젊은이들은 고등 교육을 받고 좋은 학교를 졸업하는데도 불구하고,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페이가 높은 정규직의 상당수는 외국인들 혹은 중국인들의 차지다. 게다가 일자리를 구했다고 하더라도 월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홍콩 젊은이들은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집에서 계속 눌러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픈 청춘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참, 홍콩의 외노자의 또 다른 단점 중 하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 홍콩은 간이역에 가깝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에게 홍콩이 종착역이 될 수도 있겠지만 수 많은 사람들이 주재원, 유학, 이직 등 자의든 타의든 홍콩에 왔다가 또 그렇게 떠난다. 때문에 홍콩에 사는 사람들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체화하고 있다. 나도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외노자 생활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장점들을 (저렴한 의료비, 밤에도 안전한 치안, 잘 정비된 인프라, 빠른 행정처리 등) 떠올리면, 추후에 기회가 닿으면 홍콩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간다해도 아마 홍콩의 야경 및 붉은 택시를 그리워하겠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더니, 역시 사람은 늘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갈구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