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살던지 나름의 애환이 있게 마련이다
뉴욕으로 1주 여름휴가를 갔다. 미디어에서 봐온 화려한 뉴욕의 모습 때문에 진즉부터 여행이 무척 기대됐다. <섹스 앤 더 시티>나 <가십걸> 같은 드라마에서 비친 뉴요커의 이미지는 "쿨함"이다. 아침에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바쁘게 일과를 마친 후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거나 재즈바를 가는 그런 세련된 도시인. 그리고 주말에는 브런치를 먹고 미술관도 가고 때로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보는 그런 근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하지만 뉴욕에서 일하는 지인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본 뒤, 실제 뉴요커들에게 쿨함은 거리가 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나는 외노자라는 공통점이 있기에, 죽이 잘 맞았는데 공통된 애로사항은 비싼 물가, 특히 집 값이었다. 홍콩과 마찬가지로 뉴욕 맨해튼도 집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급여가 상대적으로 높은 금융인들도 생활에 애를 먹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뉴욕 도시 박물관에 가보니, 역시 자본주의의 총아답게 뉴욕의 지난 십여 년 간 집 값 상승률은 임금 상승률을 상회했다. 트럼프 같은 자본을 가진 부자들은 계속 부가 늘어나고,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뉴욕에 온 외노자들은 높은 집 값으로 중산층이 될 기회가 점점 적어지는 셈이다. 세계 금융의 중심 월스트리트에서 일한다고 해도 내가 만난 한인 뉴요커들은 다들 불안한 미래와 살인적인 물가에 사는 게 녹록지는 않아 보였다. 이방인이 바라보기에 화려한 생활을 할 것 같은 뉴요커들도 나름의 애환이 있는 셈이다. 금융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월스트리트를 동경하고 일하는 것을 꿈꿔 봤을 테고, 나도 한때는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동경했었는데. 나참.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인 가 싶다.
뉴요커 지인들을 만난 후, 최대한 현지인의 시각에서 뉴욕을 보려고 했다. 랜드마크에서 사진을 찍고 바삐 움직이는 여행자가 아닌, 여행지라는 환상에 가려진 명암을 차분히 관조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문득 식당 점원들은 대부분 유색인종인 것이, 거리에 홈리스들이 부쩍이나 많은 것이, 동네마다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확연히 차이 나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작 여행자 주제에 얼마나 자세히 알겠냐만, 어쨌든 내가 느낀 뉴욕은 양극화와 계급화가 꽤나 고착화된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들을 보니 유학생 신분으로 한국인이 월스트리트에서 정상의 위치에 가기는 정말 힘들다는 어떤 한인 뱅커의 탄식이 십분 이해가 갔다. 그는 씁쓸한 어조로 보통 월스트리트 내에서도 주니어들은 아시안이고 매니저 급 시니어들은 대부분 백인이라고 말했는데, 다문화 도시인 뉴욕에서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은 분명 근사한 도시다. 이민자들이 주류를 이뤄 다름을 인정하고 자유를 추구하는 도시. 멋과 예술을 아는 도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어느 지하철 역에서 본 공연이었다. 아무런 악기 없이 홀로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에게, 지하철 플랫폼 반대편에서 박수를 쳐주거나 지나가는 행인이 콜라보로 같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나 지나가는 행인은 귀에 헤드폰을 꽂고, 잔뜩 자신의 필에 심취해서 같이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다시 갈 길을 재촉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런 돌발 행동이 대단히 놀랍지는 않은 듯해 보였다. 이렇게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문화가 얼마나 멋진가!
나는 평소에 홍콩에 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뉴욕의 이런 모습들을 보니 홍콩의 편리한 대중교통, 저렴한 택시, 늘 먹던 홍콩 음식이 그리워졌다. 역시 사람은 떠나 있을 때 자신의 현재 환경에 소중함을 느끼는 법인 것 같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칠 때, 자신의 주변을 부정하고 다른 환경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는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다. 특히나 최근 들어 헬조선이 부각되면서, 해외생활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는 것 같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뉴요커, 파리지앵 같은 근사한 외국 생활을 꿈꾸며 한국을 도피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천만의 말씀. 여행과 삶은 확연히 다르다. 환경이 바뀐다고 내 삶이 통째로 바뀌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어디에 살던지 나름의 애환이 있기 마련이다. 부디 현재 환경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이민은 신중히 고민하길. 아- 한국에서 순대전골에 소주 먹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