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동질감과 소속감은 본질에서 벗어나 불필요한 화를 낳는다.
헬조선을 주제로 국내 명문대 교수들이 뜨거운 논쟁을 벌이는 것이 SNS에 화제다. 사건의 발단은 KAIST 교수로 재직 중인 이 교수가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라는 글이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과거 한국이 지지리 못살던 시절을 겪은 부모 세대가 고생하고 성취한 것을 폄하하지 말 것이며, 유악한 태도로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현 젊은 세대를 호되게 꾸짖는 내용이다. 이에 맞서 한양대 박 교수는 "5천 년 역사의 최고 행복 세대의 오만"이라며 이 교수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주된 요지는, 한국 고도 성장기의 과실을 누린 현 기성세대는 현재 희망을 가지기 힘든 젊은이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훈계보다는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다는 내용이다.
글의 내용을 보아하니, 두 분 모두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자수성가하신 훌륭한 분들이다. 그리고 내 생각엔 두 분 모두 나름의 진정성과 선의를 가지고 글을 쓰셨고,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나는 현재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구조적인 저성장 및 후진적인 사회 인식 및 시스템으로 왜 국민들이 한국을 헬조선이라 부르는지 십분 이해가 간다. 그리고 헬조선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단 시간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기에, 젊은이들이 지치지 않게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가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나친 패배주의에 젖어 있거나 헬조선을 벗어나 해외로 도피하면 당장 기적이라도 이뤄날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은 나도 좀 불편하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변화를 가져올 행동은 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 그리고 나는 극단적인 꼰대들은 혐오하지만,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은 가지고 있고 그들이 닦아온 길에 고마움도 느낀다.
나는 이렇게 다른 가치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건강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좋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동질감을 느끼는 반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경악했던 것은, 그분들이 SNS에 올린 글의 댓글들에서였다. 분명 본질에서 벗어난 주제를 가지고, 자신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방을 깎아내리려는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이들은 나와는 생각이 다르다, 이견이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와 같은 "다름"의 전제에 바탕을 둔 대화가 아닌, 자신과는 생각이 다른 상대를 "틀림"으로 규정하고 적으로 몰아세웠다. 예컨대 문돌이 공돌이, 좌파 우파 등 주제와 동떨어진 이슈를 들먹거리며 상대방을 신랄하게 욕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다.
이 두 교수님들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도 아니고 단지 어떤 논점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SNS라는 미디어를 통해 표현한 것뿐이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런 류의 논쟁을 반긴다. 그런데 댓글을 단 일부 사람들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질감과 소속감이 이견을 가진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들에게서 파생된 화는 바이러스처럼 전이돼서, 댓글에 댓글을 달고 크고 작은 대립을 만들었고 본질을 왜곡했다.
이걸 보고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국가, 회사, 계급, 세대 같은 것 등에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지만, 이러한 대상은 실체가 없으며 동질감과 소속감은 일종의 관념이다. 예를 들어, 일본 젊은이들이 기꺼이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에 지원한 것이나, 나치가 죄책감 없이 잔인하게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도 모두 당시 구성원들이 느꼈던 끈끈한 동질감과 소속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냐 싶지만, 이렇듯 동질감과 소속감이라는 실체 없는 관념은 충분히 집단을 광기에 물들게 하고 비극을 낳을 수 있다. 약삭빠른 정치인이 이런 점을 이용해서, "우리"와 "만들어진 적"을 구분 지으며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권력을 잡는 역사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봐왔고, 앞으로도 볼 것이다.
영화 <아메리카 히스토리 X>의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백인 우월주의자다. 그는 백인 우월 단체에 가입해 동질감과 소속감을 느끼고,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으로 인종차별을 주도한다. 그는 지독히 유색인종들을 증오하고 분노를 떠트리며 급기야 살인을 하게 된다. 결국 교도소로 간 그에게 한 흑인이 묻는다. "네가 한 행동들이 네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었니?" 주인공은 그만 울음을 터뜨린다.
다시 논란의 헬조선 논쟁으로 돌아와, 본질에서 벗어나 대립의 날을 세우고 불필요한 화를 증식시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키보드로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저주해서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삶이 좀 나아졌냐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한국을 더욱 헬조선으로 만드는데 이바지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7D_z0pMF37Q&t=6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