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불멸에 대하여
밀란 쿤데라는 말했다. 불멸에는 큰 불멸, 작은 불멸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큰 불멸은 세대에 세대를 거쳐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그런 불멸이다. 예수,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선지자들 그리고 처칠, 괴테, 베토벤, 미켈란젤로, 히틀러, 아인슈타인과 같이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인, 정치인, 예술가, 과학자 등의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역사인 셈이다. 한편 작은 불멸은, 자신이 생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때때로 회자되고 기억되는, 큰 불멸 대비 다소 소박한 수준의 불멸이다. 누군가 죽은 뒤에도 주변 사람들이 때때로 그와 함께한 추억들을 이따금씩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것. 이 정도가 작은 불멸을 위한 요건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대개 바쁜 일상을 살며 망자를 그리워할 여유가 없고 죽음과 이별의 헛헛함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서서히 그를 잊게 마련이다. 때문에 작은 불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며 이를 결코 시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들이 유명인이 될 수는 없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작은 불멸이 그나마 실현 가능한 목표인 셈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순간, 작은 불멸의 촛불은 너무나도 쉽게 꺼진다. 조금씩 나이를 먹을수록 느끼는 것은, 우리는 매일 잊혀져간다는 것. 노래하는 시인 김광석도 <서른 즈음에서> 다음의 가사말을 노래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 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김광석 <서른 즈음에> 中-
아직 20대였던 시절, 우리의 20대 마지막 날을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부르며 기념하자는 다짐을 했던 녀석들은 어느덧 결혼을 하고, 외국에 나가고, 바쁜 회사일 때문에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이제는 다 같이 모이려면 한 두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 하고, 특히나 결혼한 녀석들이 마누라 눈치를 보며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가 내겐 없다. 각자의 삶을 살며 함께할 시간이 적어지고, 우리는 점점 더 멀어져 가며 조금씩 잊혀져 가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 종종 귀찮아하며 이렇게 말한다. "쟤는 꼭 자기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아" 하지만 나는 필요할 때라도 나를 찾아주는 것이 좋다. 몇 년 간 연락을 안 하고 소원하게 지낸 사이더라도 상관없다. 내게 연락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서 아직 잊혀지지 않고 불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일정 수준의 고독이 인간의 숙성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잊혀지지 않고 쓸모 있는 사람이 돼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작은 불멸을 하는 것이 실로 얼마나 멋진 일인지.
만화 <원피스>의 수많은 에피소드 중 명장면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쵸파를 키운 닥터 히루루크가 독재권력의 함정에 빠져 죽기 전 장면이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명대사를 남긴다.
"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심장 깊숙이 총알이 박혔을 때? 아니.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아니. 맹독 버섯 수프를 마셨을 때? 아니야! 바로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혀진다는 것은 죽음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잊혀짐은 곧 작은 불멸의 촛불이 꺼짐을 의미한다. 사람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동물인데, 주위 사람들에게서 잊혀진다는 것은 곧 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을 뜻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한 맥아더 장군의 명언은 노병은 죽어도 그 정신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맥아더는 노병은 잊혀진다라는 씁쓸한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잊혀지고 희석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마츠코는 말년에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철저히 칩거생활을 하는데, 그녀는 망자 (亡者)의 생을 스스로 택한 셈이다. 아무도 찾지 않고 기억해주지 않는 삶은 설사 육신이 살아있다 하더라도 죽은 삶이다. 우리가 가장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남들에게 기억되고 회자될 때다. 나는 육신의 불멸을 넘어 큰 불멸이나 작은 불멸을 바란다. 큰 불멸은 내가 입지전적인 업적을 세워야 하므로 (혹은 정말 세대에 거쳐 욕을 먹을 정도로 파렴치한 나쁜 짓을 하거나) 어려울 것 같고, 작은 불멸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나는 누군가 언제라도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기왕이면 오래도록 주위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고 찾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작은 불멸을 향한 바람 또한 이뤄지기 쉽지 않은 욕심임을 알고 있다. 이렇게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