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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Aug 13. 2017

무어의 법칙과 인간의 생산성

생산성 만능주의

반도체 업계 용어 중, '무어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수십 년간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회사였던 인텔 (인텔이 강했던 PC 시장의 부진과 삼성이 주도하는 메모리 업계의 호황으로, 최근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 타이틀을 삼성에 내줬다)의 파운더인 고든 무어가 주장한 것으로, 반도체의 성능이 2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반도체 제조 공정의 복잡화로 기간이 늘어나면서 무어의 법칙이 깨졌다는 이야기를 한다) 성능이 증가하는 반면, 생산 비용은 싸지기 때문에 인텔이나 삼성 같은 반도체 생산 업체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migration (반도체의 소형화 및 생산능력의 극대화)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며 매년 조 단위의 투자를 한다. 공장은 쉬지 않고 돌아가야 하며, 기술개발에 뒤쳐지거나 수율 (완제품 생산 성공 비율, 높을수록 좋다) 이 떨어지는 것은 회사에 치명적인 손해로 이어지거나, 심지어 회사의 존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처럼 제조업 중 가장 치열하게 생산성을 따지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 제조 업계다.

무어의 법칙

반도체 (특히나 메모리)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급격하게 가격이 하락하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완제품 업체들 - PC, 스마트폰, 서버 등) 제 값을 주고 칩을 팔기 위해서는 최신기술이 적용된 신제품을 팔아야 한다. 따라서 반도체 시장은 생산성이 높은 최신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할 역량이 되는 소수의 사업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다. 기술 개발에 뒤쳐진 기업들은 (그나마 한 3등까지는 근근이 버틴다) 구식이 된 칩들을 헐값에 팔아야 하기에 공장을 돌리는데 소요되는 높은 고정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과거에는 일본이나 대만에서 반도체 시장에 진출한 걸출한 업체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경쟁에 밀려 망했다. 반도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도시바도 경영난을 겪으며 시장에 매물로 나와있다.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에 뒤쳐지는 것은 곧 죽음이다.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1GB DRAM 메모리 가격

무어의 법칙을 왜 이야기하냐면, 인간이 점점 반도체 칩처럼 변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고, 일하고, 자기 계발하고, 멀티태스킹 하고, 일과 육아까지 완벽하게! 무어의 법칙 속 반도체 칩처럼 인간의 생산성은 날로 높아지고 삶은 가속화되며, 우리는 무언가에 쫓겨 늘 시간이 부족하다. 높은 생산성을 위해 바쁘게 사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서, 때때로 잉여로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자책이나 불안을 느끼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람들은 자학적 이리만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바쁘게 살지만, 경쟁은 경쟁을 부추기고 웬만한 능력과 노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를 만든다. 무어의 법칙은 생산성 증대뿐만 아니라 비용의 하락 (그리고 판매하는 반도체 칩 가격의 하락) 도 의미하기에, 이 법칙이 인간에게 시사하는 바는 웬만한 상위권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가치가 재고품 떨이처럼 급격하게 하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가속화된 삶을 살며 사색과 여유는 사치처럼 여겨지고,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인식 없이 정체된 질주를 한다.


게다가 우수한 스펙을 갖춰 조건이 괜찮은 직장에 취업하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이 최고 목적인 교육기관 (마치 생산성이 높은 반도체 칩을 양산하는 공장처럼!) 역시 인간의 반도체칩화에 한몫하고 있다. 이런 교육 환경 속, 문학, 철학, 예술과 같이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들은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오로지 생산성 증대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 (취업하기 좋은 자격증, 외국어, 코딩 등)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문제는 이런 효율성과 생선성 위주의 교육과정을 우수하게 이수한 사람들에게서 창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며, A등급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기업이나 공무원, 법률가 의사와 같은 전문직이 되고자 한다. 혁신적인 기업가 혹은 인류에 영감을 주는 사람들은 보통 C등급 학생들일 확률이 높고 이들이 A등급의 학생들을 고용하지만, 생산성 (우수한 성적)을 제 1의 가치로 신봉하는 교육기관 내에선 창의성이 발휘되기 어려우며, 이들은 대개 불량품으로 취급받는다.


나는 시장경제를 지지하고 경쟁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 느끼는 점은 분명 과도한 수준으로 생산성 향상과 경쟁에 목을 매고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바쁘지 않으면 잘못한 것처럼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고, 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의 시간관이 미래에 치우쳐 있다고 느끼는데, 노년에 누릴 경제적 여유를 위해 가학적일 정도로 현재를 소진하는 것 같다. 생산성 만능주의 하에, 쉬지 않고 돌아가는 반도체 제조 공장처럼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고 성과를 극대화하며 경쟁에 뒤쳐지면 끝장날 것처럼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생산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삶의 태도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종국에는 불행을 느끼고 번아웃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나도 그랬었고.


아- 인간은 반도체 칩이 아닌데. 그런 존재가 아닌데. 만약 무어의 법칙이 반도체를 넘어 인간에게도 적용이 확산된다면 시사점은 두 가지다.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가치가 구식 반도체 칩처럼 헐값이 될 것이라는 점과 인간이 기계화되면서 로봇과 차별화할 수 있는 영역이 적어질 것이라는 점. 자본주의나 시계의 확산으로 분명 수 백 년 전부터 인간의 시간은 파편화되고 삶의 가속화는 시작됐는데, 어째서 갈수록 점점 더 삶이 바빠진다고 느끼는 걸까? 바쁨의 미래는 무엇일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해서 <바쁨에 관하여> 같은 매거진을 만들어보면 재밌을 것 같다. 


++ 아래는 제가 최근에 읽고 있는 (혹은 읽을) 시간이나 바쁨에 관련한 책입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외에 좋은 책이 있으면 추천을 받습니다. 댓글에 달아주시면 바쁨에 관해 고민하고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나 바쁨에 관한 책

- 타임 푸어

- 피로사회

-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 시간의 향기

- 나는 왜 시간에 쫓기는가 

- 게으름에 대한 찬양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늦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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