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지배 #4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는 붉은 여왕의 손에 이끌려 앨리스가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있는 것을 보고, 앨리스가 이유를 묻자 붉은 여왕은 답한다. “이 세계에선 네가 뛰는 동안 주변의 환경도 바뀌기 때문에, 네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 해. 앞으로 나아가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되지!” 미국의 생물학자 리 밴 배일런 박사는 붉은 여왕의 이야기를 비유로 들며 종의 진화와 멸종을 설명했다. 즉, 어떠한 종이 진화할 때 다른 종도 마찬가지로 진화하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고, 여기서 도태된 종은 멸종한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생물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죽도록 발전해서 살아남거나 혹은 도태되거나.
인간의 삶이 점차 가속화되면서, 바쁨은 선택이 아닌 강제가 됐다. 붉은 여왕의 이야기처럼, 대다수의 주변 사람들이 바쁘게 사는 환경에서 자신만 바쁨을 피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처럼 바쁘게 살아야 도태되는 것을 면한다는 생각에 기꺼이 바쁨의 지배를 받아들인다. 마치 네트워크 효과처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살면서 바쁨은 점차 증폭되고 바쁘지 않은 상태를 마치 무능력함, 게으름, 한심함 따위와 같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회풍토마저 생겨났다.
문제는 지나친 바쁨으로 인해 잃게 되는 것들이다. 바쁨을 극대화하는 사람은 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소중한 시간, 생각의 정리, 일상의 소소한 변화를 느낄 틈이 없다. 무엇보다도 기계적으로 바쁨의 관성에 떠밀려 살다 보면 ‘정체된 질주’를 할 가능성이 높다. ‘정체된 질주’란 깊이 있는 사색이나 삶의 여백이 결여된 채, 목적 없이 그저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내는 상태를 뜻한다. 삶의 템포가 빠른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경우, 정체된 질주인 상태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삶의 변동성이 확대되고 10년 혹은 20년 후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되면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바쁘게 사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바쁨은 불안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다. 한국의 경우, IMF의 위기를 거치며 실직에 대한 공포가 확산됐고, 뭔가를 바쁘게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 미디어와 사교육 업계는 공포 마케팅을 하며 사람들에게 평생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람들은 뭔가를 학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자신을 바쁨의 소용돌이에 갈아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정도 바쁘게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아가며 성장하고 있어”라는 착각은, 붉은 여왕 이야기처럼 정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체된 질주의 특징은, 잠시 멈춰서 깊은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정체된 질주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가지고 깊게 생각해보려고 하면 주변에선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바빠 죽겠는데 그럴 시간이 어딨어?” 때로는 부모, 선생, 상사의 얼굴을 한 누군가가 당신을 바쁨의 레이스로 몰아넣으며 정체된 질주를 할 것을 강요하는데, 이러한 관성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20대, 30대를 거쳐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니 딴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매 순간 듣고 자라며, 우리는 정체된 질주를 지속한다.
정체된 질주는 교육의 문제가 크다. 교육 기관은 대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단지 어떻게 해야 높은 점수를 받고 상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려줄 뿐인데, 이것을 참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에서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우등생은 ‘왜’라는 질문보다는‘어떻게’라는 요령에 도가 튼 사람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학생보다,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이 말하는 것을 녹음기까지 켜가며 기계적으로 한 자 한 자 받아 적거나 사교육에 흠뻑 노출된 학생이 좋은 성적을 받고 상위 대학에 가는 것이 교육의 현실이다.
사교육의 지출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이런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진 사람은 성인이 돼서도 스스로 사고할 능력이 결여된 채, 정체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계발 학원들이 (외국어, 코딩, 자격증 등) 우후죽순 생겨나고, 적성에 맞지 않아 회의감을 느끼고 입사 1-2년 만에 퇴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도 ‘왜’라는 근본적인 고민이 충분히 선행되지 않은 채 정체된 질주를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점차 삶의 템포가 빨라지는 속에서, 정체된 질주를 하는 사람들이 겪는 피로감과 자괴감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굳게 확신한다. 지금 정체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바쁨에 잠식당할 것이고, 이에 만성적인 피로를 호소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자고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했다. 바쁨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지, 바쁨은 어떻게 탄생했는지, 바쁨은 어떻게 강제가 됐는지, 바쁨은 어떻게 확산되는지, 바쁨의 미래는 어떤 것일지 등 바쁨에 대해서 알아야 바쁨을 현명히 다룰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기는, 삶의 속도가 점차 가속화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사람들이 바쁨에 대해 이해하고, 정체된 질주를 멈췄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파트에서는 어떻게 바쁨이 탄생했는지에 대해 면밀히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