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드디어 내 생일 전날이 되었다. 생전 남자, 아니 남에게, 아니 가족에게도 부탁이란 걸 해본 적 없었는데 무슨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다. 문자였는지 전화였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분명 다음 날이 내 생일이라고 알리며 약속을 잡았다.
"내일이 내 생일인데 맛있는 거 사준다며..."
"아 미안! 사줄게. 저녁 먹자!"
'어떡해, 어떡해...' 하며 정확히 약속 4시간 전부터 뭘 입어야 할지,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호들갑 떨던 내 모습을 종종 떠올려 본다. 평소 콤플렉스가 있어 여성스러운 옷이라곤 1도 없고 그 흔한 플랫슈즈 하나 없이 운동화만 신던 내가, 너무 신어보고 싶어 혼자만 보려고 사 둔 새 검정 플랫슈즈를 오늘 개시를 할까 말까 백 번 망설이던 모습. 너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냥 취소해버릴까 몇 번 망설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잘 알지도 못했지만 이미 좋아하고 있었구나. 이미 나는 마음이 많이 기울고 있었다.
그때 당시의 내 친구들은 내가 이전에는 보여주지 못한 함박 미소를 많이 봤을 거다. 나도 모르게 처음 느끼는 행복감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문자 썸만 줄줄이 타다가 연애 한번 못해보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렇게 성년의 날을 겨우 넘길 무렵의 나는 콤플렉스 투성이었다. 키는 평균 남자 키를 훨씬 넘긴 꺽다리에다 본인의 성격을 그렇게 혐오하는 사람도 없었을 거다. 자존감이라는 건 있을 리 만무하고 그 눈부신 도시를 1분을 즐기지 못하는 쓸쓸한 유학생이었다. 나름 누군가의 짝사랑 상대였던 적도 있으니 나쁘지 않은 외모였지만 나만 나를 싫어했다. 그러다 어느 날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가 사르르 '지금 옆에 그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속으로 말을 했나 보다. 그러곤 '이건 뭐지?' 하며 스스로 너무 놀라 잠시 멍을 때렸다.
'... wish you were here. Have a good night.'
그렇게 나는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어가듯 그와 한 개 두 개 추억을 쌓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두 번의 데이트, 한 번의 영화, 한 번의 동물원 나들이가 지나가고 저런 문자를 받기 까지,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코 끝에 겨울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