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물 간 클리셰이지만, 드라마 주인공이 비빔밥을 먹으며 꿀꿀한 기분을 날려 보내는 장면은 언제나 묘하게 속 시원한 느낌을 준다.
별 재료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고, 간단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며, 비비는 행위도 비벼진 모양새도 '각 잡힌'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아무튼 한숨 돌리고 싶은 꿀꿀한 날에는 비빔밥을 떠올리게 된다.
우울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걸 봐주길 바라는 사람이 나와 전혀 다르게 세상을 보고 있을 때.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공감의 여지가 없다는 걸 느끼면 뭔가 높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된다.
일이 잘 안 풀리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 불평을 할 때도 있다. 모 드라마에서처럼 이게 최선이냐고 묻고 싶어 진달까. 세상이 나에게 좀 더 다정해져도 될 텐데. 개인적인 일을 벗어나서 뉴스만 봐도 걱정과 고민을 늘어놓을 거리는 매일 한가득이다.
이렇게 꿀꿀한 기분에 침전되려고 할 때, 나는 라이프니츠를 떠올린다. 그의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종종 라이프니츠의 말이 맞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가 있다. 그가 이렇다 할 대책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납득시켜준다. 속상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적어도 내게 있어서만큼은—“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프니츠는 낙관적이다. 그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런 주장을 듣자마자 신나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악과 부조리가 넘치는 듯한 이 세상이 최선의 세상이라니.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낙관적인 견해를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위로가 된다고 해야 할지 단언하긴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자신의 관점에서 최선이 아닌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는 비관론보다 낙관론이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이 ‘모나드’로 꽉 차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모나드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의 실체로, 무생물인 돌멩이부터 살아 움직이는 동물 그리고 이성을 가진 인간까지, 세상 만물이 모두 모나드이다.
더 이상 작게 나눌 수 없을 정도이기에, 모나드는 정해진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와 상호작용도 할 수 없다. 어딘가 푹 찌르려면 찔릴 곳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모나드에겐 ‘부분’이랄 게 없기 때문이다.
바깥과 소통이 없다는 것은 구태여 외부로부터 무언가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실제로 모나드 안에는 이미 그 모나드가 변화해갈 모습의 구체적 내용이 담겨있다고 라이프니츠는 말한다. 이처럼 모나드가 자신이 지닌 변화의 내용을 실제 세상에서 표현해내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지각'이라고 부른다.
모나드마다 변화의 내용이 다르니 각자가 세상에서 ‘지각’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따라서 사람들이 혹은 모나드들이 세상을 지각한다는 것은—다수의 모나드들이 하나의 세상을 동일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라—세상은 하나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모나드의 수만큼의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이 지각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든 모나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우주를 지각하는 살아 있는 거울"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쓰게 된다.
이 대목은 내가 느끼는 사람들 사이의 ‘벽’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로 보는 세상이 다를 수밖에 없는 모나드들이기 때문에,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생각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한 모나드가 변화하는 것은 오로지 그 모나드의 내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라니. 인간도 모나드라면, 왜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아무리 남들이 조언을 해봤자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말짱 꽝이다.
온갖 것이 전부 모나드이긴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단순한 무생물인 돌멩이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을 동일선상에 두진 않는다. 앞서 말한 ‘지각’ 능력의 정도에 따라 모나드의 수준을 구별하는 것이다.
감각기관도 없는 돌멩이에 비해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 보다 우위의 모나드라 하더라도, 인간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불완전한 모나드들이 있다면, 모든 면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완벽한 모나드도 있다. 바로 ‘신’이라는 모나드다.
어떤 존재가 완벽하다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불완전함이라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이처럼 그 존재가 필연적인 실체는 모든 우연적인 것들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 된다. 나머지 불완전한 모나드들이 생겨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모나드들이 특정한 모습으로 변화해가는 것도, 모두 이 궁극적인 모나드를 그 근거로 삼는다.
결국 이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은 신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을 근거로 해서 생성된 모나드들이 신이 설계한 대로 각자 세계를 지각하고, 그 수많은 지각들은 신에 의해 조화를 이루며 공존한다. 이때 신이라는 모나드는 그야말로 완벽하기 때문에 잘못이나 실수 같은 건 결코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는 신이 설계한 이 세계는 ‘최선’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여서 신의 목적을 이해할 수 없지만—그래서 우리가 보기엔 이 세계가 영 별로일지라도—신은 무한한 수의 가능 세계 중 이것이 최선이라는 걸 알고 선택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지론이다.
수많은 모나드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지각하면서 신이 그리는 목적에 맞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각종 다양한 재료들이 제각기 고유한 맛을 내면서 ‘맛있음’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요리. 오늘은 비빔밥을 먹는다.
긍정을 되찾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즉각적인 방법은 역시 맛있는 걸 먹는 것. 미리 내가 원하는 재료들을 모두 준비해서 비빔밥을 만들어먹을 수도 있지만, 항상 이렇게 원하는 재료가 모두 준비되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야채 한 두 가지가 모자라서 아쉽기 마련. 아니, 한 두 가지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비빔밥이 괜히 비빔밥인가. 있는 재료를 넣고 양념장으로 비비면 웬만해서 맛없는 일은 없다. 이게 가능한 조합 중 최고의 조합이라고 단언할 순 없어도, 영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 재료들도 비빔밥으로 만들면 어쨌거나 맛있어진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세계도 그렇다. 아무리 봐도 결점 투성이이지만 분명 이 세계라서 가능한 즐거움도 있다. 게다가 종종 실제로 경험하게 되지 않나, 그때 당시엔 힘들기만 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보면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일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지만, 신이라는 모나드는 아마 처음부터 그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고 불만만 쌓이더라도 조금 더 믿고 기다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중간중간 비빔밥을 먹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날들이 있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