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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Nov 21. 2020

꼴등 파티

꼴등에게 희망을 심어준 선생님 이야기

  

  꽤 늦은 시각,

버스는 피곤한 눈빛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떨군 세 명의 승객을 태우고 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 한가한 길을 지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빌딩 숲 앞에 멈췄다. 교복을 입은 다섯 명의 학생들이 어깨에 묵직한 가방을 메고 버스에 오른다. 차창 밖은 노란 차들이 겹겹이 진을 치고 서 있다. 학익진 전투라도 할 듯 길게 늘어선 차들 옆구리에는 학원을 선전하는 현수막으로 현란하다. 상위 1% 학습법이라고 쓴 노란 차가 학생들을 태우고 버스를 앞질러 달려간다. ‘ 방학 특강’, ‘스파르타식 학습’이라고 쓴 학원 차들도 줄줄이 이어 달린다.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태운 버스도 질주를 한다.  숨 가쁘게 달리던 차들이 사거리에서 제각기 흩어진다. 순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목적지를 었다.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버스 안을 둘러다.

세 명의 남학생들은 휴대폰을 보며 낄낄거리고 두 명의 여학생들은 서로 테스트를 하는지 책을 보며 소곤거리고 있다. 굴에는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교복만 더욱 돋보이게 한다.


  나의 중3 시절이 스치듯 지나간다.

  68명의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하얀 칼라를 빳빳이 세운 교복을 입고 눈동자도 돌리지 못한 채 책을 보고 있다. 간간이 책상 두드리는 막대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책을 노려본다. ‘전교 일등 전통 사수’라고 쓰인 칠판의 빨강 글씨가 우리를 조롱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학년 5반은 '전교 1 등반'이라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전통을 깨고 전교 2등을 하고 말았다.

체육 담당인 담임선생님은 이 사실에 격분했 우리 반은 토요일 수업이 끝난 후 2등의 대가를 톡톡히 받아야 했다. 벌로 운동장 열 바퀴를 돌고 이어서 토끼뜀으로 운동장 반 바퀴, 거위걸음으로 나머지 반 바퀴를 돌았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며 눈물로 사정을 했지만 선생님의 노여움은 풀리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가서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얇은 스커트 위를 마대걸레 막대로 열대씩 맞았다. 막대 세 개가 부러져 나갔다. 선생님은 교실에서 정문을 돌아 선착순 두 명이라는 구령을 외쳤다. 죽기 살기로 뛰어 돌아와도 2등 안에 들지 못하면 다시 뛰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두 번을 뛰고 앉아서 쉬었지만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달리는 친구들을 바라보기가 미안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티체조와 양쪽 옆 사람 귀를 잡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기 등 세상에 있는 벌이란 벌은 다 받은 듯했다.

  

 그 후로 우리 반은 쉬는 시간도 조용했다. 다만 의자에 앉고 일어설 때 얕은 신음소리만 가냘프게 들렸다. 무릎의 검은 멍 자국이 다리 밑으로 흘러내려서 3개월 동안은 치마 대신 체육복 바지를 입고 등교를 했다. 우리 반은 전교에서 가장 일찍 등교하고 가장 늦게 하교하는 일명 모범?이 되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반은 학년이 끝날 때까지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도 2등 반 보다 평균 5점 이상의 점수 차를 벌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칭찬도 우리의 어두운 표정을 바꿔놓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남녀 합반이었다. 학생들은 서로 어울리지 못하고 같은 성끼리 몰려다녔다. 담임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후 책상을 뒤로 물리고 둘러앉게 했다. 수건 돌리기, 윙크 게임을 하며 학생들은 자연스레 섞이게 되었고, 몸을 부딪치며 남녀가 아닌 그냥 친구가 되었다. 그 후 우리 반은 늘 떠들썩하고 재미있었다. 점심시간이면 남녀 학생들이 둘러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소풍 온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좋았다. 우리 반은 1학기 중간고사에서 전교 꼴등을 하고 말았다. 중학교 때 2등을 한 후 받았던 끔찍한 악몽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어김없이 토요일 수업이 끝난 후 남으라는 통보를 했다. 우리들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엉덩이에 방석을 넣는 등 꼴등의 대가에 대한 대비를 했다.

  

 선생님 오신다는 반장의 말에 조용히 앉아 처분을 기다렸다. 선생님은 커다란 가방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책상을 모두 뒤로 물리라고 했다. 어떤 벌을 받을지 몰라 긴장한 65명의 학생은 재빠르게 행동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전교 꼴등을 했다지?”

  “선생님, 죄송합니다.”

  “꼴등을 하니까 기분은 좋지 않지? 하지만 너희들이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언제 또 꼴등을 해 보겠냐. 역사적인 이날을 기념하여 파티나 하자.”

 선생님의 커다란 가방에선 초코파이와 요구르트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 반 66개의 소중한 희망을 담아 예쁘고 튼튼하게 쌓자. 그리고 가운데엔 촛불도 붙여야지?”

  “꼴등 축하합니다. 꼴등 축하합니다. 내 일생에 단 한번 꼴등 축하합니다”

 선생님은 카메라를 가져와서 기념사진까지 찍어주었다. 어색한 표정에 브이까지 만들며 찍은 사진이 내 추억의 앨범에 꽂혀있다.

  그 후 우리 반은 조금씩 성적이 올라갔다. 비록 일등은 못했지만 학년을 마칠 때는 전교 2등의 쾌거를 올렸다. 하지만 노는 것, 반 단합, 전교에서 제일 즐거운 반으로는 늘 일등이었다.

  

 그해 여름, 수박농사가 풍작이었다. 그러나 수박 값은 그야말로 똥값이었다. 농민들은 수박밭을 트랙터로 갈아엎고 수박이 물러 터지도록 밭에 그대로 두었다. 담임선생님은 학교에 하루 걸어온 값으로 농민을 돕자고 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 왕복 값 50원을 반 회비로 걷었다. 거기에 선생님이 돈을 보태니 손수레 가득 수박을 살 수 있었다. 운동장에 모여 수박파티를 열었다. 서로 마주 보고 수박 빨리 먹기를 하는데 빨간 수박 국물이 콧구멍으로 줄줄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며 얼마나 웃음을 참아야 했는지. 수박씨를 떼어내며 일그러진 얼굴을 찍어대는 선생님과 그 엉덩이를 걷어차던 친구들, 수박씨 멀리 뱉기 할 때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씨를 삼키고 캑캑거리던 순간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재미있는 학교, 자꾸만 가고 싶은 학교, 어른이 되어서도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수 있는 학교가 새삼 그리워진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아니 그 유행어는 요즘 아이들에게서도 심심찮게 들리는 말이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전교 1등을 했던 아이가 아파트 20층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며 남긴 유서가 행복해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한 요즘 아이들을 대신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비록 꼴등을 했어도 위로해주고 손뼉 쳐 주었던 선생님이 있었기에 학교는 즐거움의 장소가 되었고, 느리게 가도 기다려주고 같이 갈 친구들이 있었기에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던 버스가 조용한 주택가 정류장에 멈춰 선다. 여학생이 내리자 아이의 엄마인듯한 여인이 아이의 등에서 가방을 받아 든다. 아이는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처진 어깨를 엄마에게 내어준다. 두 사람의 살가운 대화를 남겨두고 버스는 다시 어둠 속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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