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살이 창가에 다가와 문을 세차게 두드려도 아이들의 방은 미동도 없다.며칠 동안 잠을 굶은 사람처럼, 아니 겨울잠을 자는 듯 기숙사는 고요하다.
"내일은 브런치다."
(브런치=Breakfast + Lunch를 합성해서 만든 영어 단어, 아점. 아침 겸 점심의 줄임말.)
아이들은 환호성과 함께 밤이 늦도록 소곤소곤 재잘재잘 거리더니 아침이 되어도 기숙사는 잠자는 숲 속 공주의 성이다.
우리 방 룸메들도 제각각의 모습대로 늦잠을 즐기고 있다. 누가 깰세라 조용히 씻고 텀블러에 녹차 한 잎 담가 산책로로 나선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이슬방울들이 가느다란 잎에 매달려 영롱하게 빛을낸다.
이 시간에 이렇게 한적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이른 아침에 바기오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건 닭들의 노랫소리다. 그러나 지금은 닭들도 늦잠을 자는가. 멀리서 메아리치듯 개 짖는 소리만 활기차다.
길은 있어도 다니는 사람이 없어 잔풀로 우거진 곳으로 들어서면 나만의 공간이 나를 반긴다. 하늘로 쭉쭉 뻗은 소나무 숲에 작은 돌의자하나. 밤새 사뿐히 내려앉은 이슬 방울이 아무도 오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신문지 한 장 펼치고 앉아 심호흡을 하면 오롯이 나 혼자 이 세상을 소유한 듯 행복한 탄성이 속으로부터 솟아오른다.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 참으로 행복한 아침이다.
"오늘(7일) 0시 기준 국내 코로나 19 신규 확진자 수는 600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중앙 방역대책본부는 어제 하루 전국에서 지역감염 환자가~"
오늘은 브런치를 하는 날이라 여유롭게 뉴스를 켠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 소식이 연일 들려오면 희망 없는 탄식소리만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참으로 슬픈 나날들이다.
지난 4월 쫓기듯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우리는 8월에 충북 영동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하며 언제쯤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점쳐 보곤 했다.
하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을 보고 들으며 장기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유롭지만 꽉 짜인 수업 일정에 이젠 적응도 할 만 한데 아이들은 갑갑함을 호소하곤 한다.마스크에, 손 소독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영동 시내에서 생필품 구입할 시간을 주기도 하고 코로나로부터 안전한 지역을 찾아 1박 2일 학년별 MT도 하면서 아이들의 갑갑증을 해소해 줄 방안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은 브런치를 하기로 했다.
바기오에서와 똑같이 아이들의 밤은 늦게까지 이어졌다. 11시 소등시간이 지난 지 한참 되었건만 소곤소곤 재잘재잘 까르르~
아이들은 슬픔도 괴로움도 금방 잊는 것 같아 좋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 아이들을 뒤로한 채 텀블러에 모닝커피를 가득 담아 언덕을 내려간다. 백화산 산자락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얼굴을 쓰다듬는다. 버스가 나를 기다리듯 입구에 정차해 있다. 탑승자는 기사님과 나. 단 둘 뿐이다.
버스가 가는 코스도 모른 채 월류봉으로 간다는 정보만 가지고 차에 올랐으니 기사님께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처음 들어 본 지명을 들으며 시골 동네를 구비구비 돌아 나와 월류봉에 도착을 했다.
달도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은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시가 저절로 떠오를 것 같은 아름다움에 취해 낮달이 되어 한참을 머물렀다.
월류봉 둘레길은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어 혼자 걸어도 전혀 심심치 않다. 기분 탓일까. 이곳을 걸으면 포도향을 느낄 수 있다더니 어디선가 향긋한 포도향이 함께 걷는 것 같아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영동은 포도뿐만 아니라 감의 고장이다. 풍성한 감 가로수는 그 길을 지나는 이에게 풍요로움을 선물한다.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영동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다.
되돌아오는 버스를 다시 타고 오는 동안 기사님은 호두 한쌍을 쥐어준다.영동의 과실 하나 추가요.
기숙사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여유롭게 잠을 잔 덕분일까.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여유를 즐기는 형태는 다르지만 제 각각 필요를 채우고 나니 행복이 한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